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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19 청군을 격퇴하는 선전(善戰)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 여 큰 타격을 입고 수십 명만이 본대가 있던 양근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외에도 12월 25일에 토산에서 청군에게 패배하고 2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광릉을 거쳐 미원에 도착한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삼각산 전투에서 패퇴한 심 기원(沈器遠)의 군사 2천여 명과 함경감사가 이끄는 7천여 명, 강원감사의 근왕군 6천여 명을 통합하여 1만7천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였으나, 여주․이천 등지에서 청군이 남한산성에 이르는 통로를 봉쇄하고 있었고, 전투태세가 제대로 갖추어지 지 못한 관계로 인조가 항복한 1637년 1월 30일까지 청군의 동태만 관찰하면서 미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인조가 기다리던 도원수와 부원수군은 이렇게 움 직이질 않았다. 평안 병사 유림(柳琳)이 이끄는 근왕병도 김화 전투에서 청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가평까지 진출하였으나, 이미 인조가 항복한 후였다. 충청도와 전라도 근왕병도 1월 2일과 4일 각각 험천현(險川峴)24)과 광교산(光敎山)25)까지 진출하여 남한산성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청군의 공격을 받아 각각 공주와 수원으 로 퇴각하였다. 경상도의 근왕병 2천여 명은 1월 2일 여주(驪州)까지 진출하였으 나, 1월 3일 청군의 공격을 받고 조령(鳥嶺) 방면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와 같 이 인조의 근왕 호소에 따라 조선의 각 지방에서는 근왕군이 모집, 형성되어 남 한산성으로 진출하였으나, 병사들의 훈련이 안 된 상태에서 보급까지 부족하여 제대로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특히 근왕병을 지휘하던 지휘관들은 군사지식과 경험 부족은 물론 전투 자체를 두려워하여 진군을 겁내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이들 근왕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에게 반격작전을 수행 하여 전세(戰勢)를 역전(逆戰)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바람에 불 과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도 불구하고 별로 효과를 달성하지 못한 청군은 약점을 노출시켜 조선군을 유인하려는 계략을 사용한다. 상사창리(上司倉里)에 주 둔하고 있던 청군은 남한산성 북문 아래 다수의 군사를 매복시키고 조선군의 시 야에 노출되는 지역에 노약병 약간과 많은 숫자의 우마(牛馬)를 남겨둔 뒤에 주 력을 인접 가지리(可枝里) 방면으로 이동시켜 놓고 조선군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 었다. 주 24) 남한산성 남쪽 16㎞ 지점. 25) 남한산성 남쪽 40㎞ 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