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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17 으나, 산성에는 1만여 명이 1개월 정도 지탱할 수 있는 분량인 쌀 1만 4,300여 석, 잡곡 3,700여 석, 피곡(皮穀) 5,800여 석과 장 220여 독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 리고 각종 화기 및 궁시 등 수성(守城)에 필요한 장비와 혹한기의 전투수행에 필 요한 장구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남한산성에서의 장기적인 방어전 수행은 스스로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작전의 효과를 보장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인조는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근왕병이 산성의 포위를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도체찰사 김류(金瑬), 협수사, 관향사 등과 동, 서, 남, 북문의 수비군 대장 과 부장 등을 임명한 다음 각 수비군에 3천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문무백관과 종 실노복들까지 배정하여 방어작전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도원수, 부원수 및 8도 감 사, 병사들에게 교서를 내려 근왕병을 남한산성에 집결하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 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병을 요청하였다. 인조 일행의 뒤를 추격하여 12월 15일 남한산성에 도착한 마푸다의 선봉 부대 는 4천여 명에 불과하였고 계속된 강행군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화의교섭을 구 실로 12월 18일까지 별다른 공격을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19일 청의 좌익군 주력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남한산성 내 조선 군은 근왕병과 명군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왜냐하 면 명나라는 각 지방의 유적(流賊) 토벌에 여념이 없었고, 산동반도에 있던 약간 의 수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지원하려 하지만 풍랑으로 이것마저 단념했기 때문이 었다. 따라서 남한산성의 조선군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청군의 공격은 물론, 추 위와 배고픔과도 싸워야 하는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동안 전열을 정비하고 있던 청군은 12월 22일 약 5천 명의 병력으로 동, 서, 남, 북문에 각 1천 명씩을 투입하여 공격을 가해 왔다. 청군은 성에 접근하여 화 포사격을 가하면서 기선을 제압한 다음, 운제(雲梯), 당차(撞車) 등을 가지고 각 성문으로 돌진해 왔다. 조선군은 성 안의 화포와 시석(矢石)으로 청군의 접근과 등성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12월 23일, 청군은 1만 명을 동원하여 공격을 재개 하였으나 조선군은 소극적인 방어태세를 지양하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 적극적으 로 청군을 공격하여 미처 공격준비도 갖추지 못한 청군을 200여 명 사살하는 전 과를 거두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