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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전쟁사Ⅰ 수도 서울지역 전례 연구 116 군사연구 제126집 1636년 4월 국호를 청이라고 고친 태종은 조선이 계속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12월 2일 청․몽골․한인으로 편성한 13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조선 침공을 단행하였다. 당시 조선은 전쟁에 대비하여 의주․안주․평양․황주․평산 등의 변방 요지를 담당하고 있던 군사들을 인근 산성(山城)으로 이동시켜 방어태세를 정비하였다. 이 같은 산성 중심의 방어태세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방어 태세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뛰어난 기동력 을 자랑하는 청군 주력부대는 조선군을 여러 산성에 고착시킨 후에 무인지경으로 한성에 진입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 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케 하고, 또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원손․ 봉림대군․인평대군을 비롯하여 종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2월 14일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군의 일부병력이 양화진과 개화리에서 한성과 강화도간의 통로를 차단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훈련대장 신 경진(申景縝)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 밖에 병력을 배치하여 청군의 도성 진 입을 막도록 하는 한편 인조는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동현로(銅峴路, 을지 로)-광희문(光熙門)-살곶이 다리-마장리(馬場里)를 거쳐 얼어붙은 신천(新川)과 송파(松坡) 나루를 건너 12월 14일 밤 10시경 남한산성으로 입성하였다. 한성은 유도대장 심기원이 6천여 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으나, 청군 좌익군 대부대가 접근하자 삼각산에 올라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청군은 한성을 무혈로 점령하였다. 한성에 진출한 좌익군은 6천여 기병을 삼각산으로 진출시켜 이를 견 제토록 하고 나머지 2만 4천여 명의 주력부대는 12월 19일 아침부터 살곶이-신 천-삼전도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직행하였다. 남한산성에 도착한 청군은 남한산성 의 동서남방의 요지와 용인, 이천, 여주에 이르는 연결통로를 차단할 수 있는 지 점에 배치하여 원거리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입성한 후 남한산성에는 광주(廣州) 진관(鎭管) 소속 5개 읍 (여주, 이천, 양근, 지평, 파주)의 군사와 인조를 수행한 경군(京軍)을 합하여 1만 3,800여 명의 병력과 문무백관 200여 명, 서리 100여 명, 백관의 노복 300여 명 등이 있었다. 이 병력으로 산성을 얼마나 오래 지킬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