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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15 세한 수준이었다. 당시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주창되었지만, 문(文)을 숭상하는 당시 분위기와 당쟁의 여파로 인해 허사가 되고 말았음을 잘 알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한강전투에서 김명원이 도망가며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보지도 못하 고 패퇴하였고, 그 후 벽제관 전투는 다소 성격이 다른 전투였다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강전투와 권율의 행주대첩이 방어 및 수성(守成)이었다면, 벽제관 전 투는 한성을 공략하는 전투였고, 조․명 연합군의 공격이었다는 점이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공격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공자(攻者)는 방자 (防者)에 비해 2배 이상이 되어야 이(利)롭다 하였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은 왜 군에 비해 절반 정도도 안 되는 수준이었는데, 이는 우키다가 한성방위를 위해 한수 이북의 병력을 신속히 집결시킨데 그 원인이 있다 하겠다. 게다가 동서고금을 놓고 볼 때 연합작전이 매우 어려움을 잘 알 것이다. 이여 송의 명군은 왜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한다면 명의 체면을 구길 것이고 승리한다 해도 많은 출혈을 강요해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략을 실시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겨우 조정 관원의 설득으로 한성 공략에 나서나, 지형의 이점을 충분히 이용한 왜군에게 패퇴하고 만다. 또한 적의 헛소문을 듣고 평양까지 철군 함으로써 조선의 사활을 건 전쟁과는 다른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행주대첩은 적은 병력으로 군․민이 하나가 되어 수성에 성공한 임진왜 란의 대표적 승전전투이다. 이는 권율 장군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전투준비, 지형 적인 이점의 활용, 민과 군의 단합된 전투의지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행주산 성(덕양산)은 한성을 위협하는 요충이었고, 왜군의 입장에서는 한성방어를 위해서 목에 가시와 같은 존재인 행주산성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 키다는 행주산성 전투에서 결정적 과오를 범하는데 그것은 한번도 현장지휘를 해 보지 못한 우키다가 단지 아집만으로 총곡격을 지시함으로 인해 결정적 패퇴를 맛보게 된 것이었다. 나. 병자호란 남한산성 농성전 : 1636년 12월~1637년 1월 / 남한산성 일대 • 조선군(심기원, 김경 등, 1만 3천) ↔ 청군(마푸다, 도르곤, 12만 3천) ⇒ 작전 결과 : 나․제 연합군 승리 백제 한강 하류지역, 신라 상류지역 10개군 분할 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