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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전쟁사Ⅰ 수도 서울지역 전례 연구 112 군사연구 제126집 3) 행주대첩 : 조선군(권율, 2천3백) ↔ 왜군(우키다, 3만) ⇒ 작전 결과 : 조선군 승리, 한성 탈환의 유리한 발판 확보 왜군은 1593년 1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비록 유리한 전과를 거두었더라도 감 히 임진강 이북을 넘보지 못하고 한성방어에만 급급하고 있었다. 또 조정에서는 가토(加藤淸正) 군대도 머지않아 철수하게 되면 관북지방의 수복이 예상되므로 한성을 다시 찾으려는 소망을 더욱 갖게 되었다. 당시 전라도감사로서 순찰사 임무를 맡고 있던 권율은 명군과 서로 호응하여 한성을 탈환코자 한성 서쪽지구에 나가 진을 치기로 결심하고 조방장 조경을 먼 저 보내 진지를 정찰케 하였다. 조경은 야음을 이용하여 한강을 건너 어떤 고지 위에 올라보니 마침 방어할 만한 요충지를 찾아 볼 수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이 고지를 생각하고 돌아와 권율에게 복명하자 며칠 후 다시 권율과 함께 가서 현지 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율은 이 고지보다 더욱 한성에 가까운 안현에 진 을 치길 원하였으나, 막하의 장수들이 이를 극력 반대하자 그의 결심을 바꾸어 이 고지를 점령키로 하는데 바로 이 고지가 곧 행주산성의 중심부를 이루게 된 것이다. 권율은 애초에는 고지에 성책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명 군의 대병력이 평양에서 남하하여 개성이남 지구에 집결 중이므로 한성의 적 주 력군이 감히 성 밖으로 대규모의 출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도체찰사로 직산현(稷山縣) 방면에서 양주에 올라와 있던 정철(鄭 澈)과 긴한 의논을 한 연후에는 이 결심을 변경하고 조경에게 성책을 급히 만들 라고 명령하니 조경은 2일 간에 걸쳐 급조목책을 설치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행 주산성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산성은 우리가 통념으로 생각하는 산성과 달리 야전용으로 한강연안에 만들었던 급조책으로 산채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권율은 이 산성을 본 다음 크게 만족하고, 뒤이어 독성산성에서 철수하여 이곳으로 옮 겨오게 된다. 행주산성에 전진한 권율은 다음과 같이 작전구상을 수립한다.「휘하 정병 중에 서 4천명을 뽑아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광교산(光敎山)에 위치하면서 한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