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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11 의 고니시와 오토모(大友吉統)군으로 하여금 한성을 수비하도록 한다. 벽제관 전투라고 이름 지어진 여석현에서의 전투는 조선과 명군의 공격으로 시 작되었다. 명군 부총병관 사대수와 방어사 고언백이 지휘하던 조․명 연합군의 기병 3,000여 명은 1월 27일 아침 여석현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고바야가 와군의 제1대인 다치바나(立花統虎)군을 공격하였다. 왜군은 허약한 병사들을 전 면에 배치하고 패주하면서 공격군을 진흙 수렁의 좁은 통로로 유인하였다. 짧은 칼만을 소지하고 진흙 수렁에 빠진 명나라 북방기병은 조총과 긴 칼을 가진 왜군 보병에 매우 취약하였다. 조․명 연합군 선봉대가 고전하고 있을 때, 명군 본대의 선봉군인 이녕(李寧)군 7,000여 명이 망객현(望客峴)을 넘어와 증원하자 이여송은 왜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호위기병 수백기만 거느리고 격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여송의 호위 기병들은 망객현 남쪽 주막리 일대에서 고바야가와군의 기습을 받 아 궤멸되자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벽제관, 혜음령(惠陰嶺)을 거쳐 파주로 퇴각하 고 만다. 한편 우키다가 지휘하는 왜군의 본대는 주막리 서쪽으로 우회하여 조․명 연합 군의 우측방을 공격하였으나, 명의 좌협대장 양원군이 조․명 연합군의 우측방으 로 진출하여 이들의 공격을 격퇴시킨다. 우키다군은 이로써 공격을 중지하고 철 수하는데 양원군도 진흙탕의 도로 때문에 왜군을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퇴각 하고 만다. 1월 28일 임진강을 건너 동파역(東坡驛)으로 철수한 이여송은 ‘명군 주력을 이 끌고 개성으로 철수하면 임진강 이북의 방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정을 관망한 후 개성 철수여부를 결정하자’는 유성룡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29일 개성 으로 철수해 버린다. 이여송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군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평 양으로 북상하려까지 한다. 여기에다 때마침 전달된 ‘가토군이 양덕(陽德), 맹산(孟山)을 거쳐 평양을 공격 하려 한다.’는 왜군의 허위첩보를 듣고 ‘평양을 지키지 못하면 명군의 후방이 차 단되니 우선 평양을 지켜야 한다’면서, 유격장군 왕필적(王必迪)군 만을 개성에 남겨 두고 주력을 이끌고 평양으로 철수해 버린다. 함경도에 진출했던 가토가 자 기부대의 안전한 한성 철수로의 확보 목적상, 평양의 명군을 고착시키기 위해 퍼 뜨린 평양공격의 위협소문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