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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09 김명원 휘하의 군사들이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자 김명원은 옷을 바꿔 입고 임진강을 향해 달아나 버림으로써 가토오는 조선군의 별다른 저 항이 없이 무사히 도하를 완료하고 남대문 방면으로 진입하여 텅 빈 도성을 무혈 입성하였다. 2) 벽제관 전투 : 조 ․ 명 연합군(이여송, 2만) ↔ 왜군(우키다, 5만) ⇒ 작전 결과 : 이여송 평양으로 후퇴, 왜군 철수에 유리한 시․공간 확보 왜군 침공군 사령관 우키다(宇喜多秀家)는 한성 이북의 병력을 한성으로 집결 지시하자, 1593년 1월 18일 고니시(小西行長)군의 한성 입성을 시작으로 한성 이북의 서부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왜군은 1월 하순까지 대부분 한성으로 집결 하였다. 50여 만의 명군이 왜군을 추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한성에 퍼지자, 한성 주민들 은 성 안에서 봉기하여 조선과 명의 연합군에 내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동향을 감지한 왜군은 1월 24일 성안 장정들을 모조리 사살하고 건물을 불태워 한성 주민들의 봉기를 사전에 봉쇄하는 한편, 함경도의 가토군을 제외한 전 병력을 동원하여 한성의 수비태세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왜군은 아직 철수하지 못한 함경도의 가토군과 한성에서 조령(鳥嶺)에 이르는 병참선을 확보 하기 위해서 투입된 병력을 제외한 약 5만여 명의 병력을 한성 방어에 투입하게 되었다. 한편 평양에 머물고 있던 이여송(李如松)은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과 조선 중신들의 권유에 못 이겨 고니시군이 한성에 도착한 1월 18일 좌협대장 양원(楊 元)군과 조선 기병 3,000여 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였다. 이여송이 평양을 출발한 18일, 의주의 선조도 남행을 시작했다. 1월 19일 개성에 입성한 이여백(李如栢) 군은 이여송의 본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조․명 연합 척후부대를 한성 쪽 으로 보내어 적정을 살피도록 한다. 조선과 명군의 척후 선봉대는 임진강을 건 너 한성 근교의 창릉까지 진출하여 1월 25일 철수하는 가토군의 수색대와 조우 격전을 치른 끝에 가토군 60여 명을 사살하고 개성으로 귀환하여 이 사실을 급 히 보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