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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07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수․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많은 출혈을 소모하였고 이민족 간의 갈등이 일어 나자 내부로부터 서서히 붕괴되고 말았다. 둘째, 백제는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였고 당․왜 등과도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고구려와의 한강유역 전투에서 패퇴한 이후 이렇다 할 힘도 써보 지 못한 채 물러서고 말았다. 역시 백제도 지도부의 사치와 내부의 적인 귀족들 의 부패로 인해 이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셋째, 신라는 3국중 가장 늦게 형성되었지만 삼국통일의 의지와 상무정신은 그 어느 국가에 뒤지지 않았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한강 유역은 비옥한 토지를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을 뿐 아니라, 당과의 동맹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해 상진출을 위해 꼭 필요한 지역이었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삼국은 수많은 대소전투를 이 지역에서 쟁탈전을 벌였지 만, 가장 늦게 출발한 신흥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통일 신라의 기반을 달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2. 조선시대 가. 임진왜란 1) 한강 전투 : 1592년 5월 2일 / 한강 일대 2) 벽제관 전투 : 1593년 1월 27일 / 벽제관 일대 3) 행주대첩 : 1593년 2월 12일 / 행주산성 1) 한강 전투 : 조선군(도원수 김명원, 1천) ↔ 왜군(가토기요마사, 1만) ⇒ 작전 결과 : 도원수 김명원 패퇴, 왜군 한성 무혈입성 1592년 4월 26일 이일(李鎰)의 상주 패전보고를 접한 조정은 서둘러 도성수비 전략을 수립하고 병조(兵曹)에서는 도성 안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 그러나 곧 이 어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도성수비전략을 포기하 고 왕의 피난을 결정하는 한편, 한강에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