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page

군사연구 제126집 105 동시에 왕자 문주(文周 : 상좌평)를 신라에 급파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고구려군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작전(火攻作戰)으로 성문을 불태우면서 통로를 개척하였다. 백제군은 한성(몽촌토성, 풍납토성 추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신라의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끝내 성내의 군․민은 동요하면서 고구려에 투항 하고 말았다. 개로왕은 수십 기(驥)를 거느리고 성을 탈출하였으나 고구려군에 게 생포되어 아차성(阿且城)으로 전송되었다가 왕실가족과 함께 참살되었다. 왕 자 문주가 신라 지원군 1만명(나제동맹에 의한 지원)과 함께 한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으므로 결국 남진하여 웅진(熊津, 현 공주)에 도읍 을 정하였다. 4) 임진강 전투 : 고구려(을밀 5천) ↔ 백제(지충 1만 / 연모 3만) ⇒ 작전 결과 : 고구려 을밀군 승리, 한수 이북의 고구려 지배 고구려 문자왕의 장자였던 태자 홍안(안장왕)은 왕위를 계승한 후 522년 8월 한주를 구출하기 위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홍안의 원정군이 평양으로부터 남하 하여 예성강을 통과하자 급보를 전해 받은 백제 성왕은 장군 지충으로 하여금 보 기(步騎) 1만을 이끌고 나가 임진강 일대에서 선전(善戰)하여 고구려 원정은 무 위로 끝나고 말았다. 528년 안장왕은 을밀을 사령관으로 하는 새로운 원정군을 파견한다. 당시 원정 군 사령관이었던 을밀은 종전에 안장왕이 시도하였던 접근방법을 탈피하여 한강 을 따라 기동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모색하였다. 즉, 임진강을 연해 배치된 백제 의 전방방어군의 측방을 우회하여 배후로 기동하여 전방 방어부대를 무력화시킨 다는 것이었다. 을밀군 제1제대인 20명의 결사대가 행주에 상륙하여 태수를 살해하자, 때를 같 이 하여 개백현 부근에 상륙한 제2제대인 5,000여명의 을밀군은 야밤을 이용하여 성현(현재의 일산)을 기습하고 신속히 고봉산성을 점령하였다. 이 위급을 들은 백제왕은 뒤늦게 연모에게 보기군(步騎軍) 3만명을 주어 안 장왕의 친정군 주력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을밀군의 매복에 걸 려 격파 당함으로써, 한수 이북의 쟁탈전은 고구려의 완전한 승리로 매듭지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