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page

Ⅰ전쟁사Ⅰ 수도 서울지역 전례 연구 104 군사연구 제126집 1) 관미성 전투 : 고구려 광개토왕(4만) ↔ 백제 진사왕, 아신왕(진무 1만) ⇒ 작전 결과 : 고구려 한수 일대의 지배권 강화 392년 7월 광개토왕은 군사 4만을 직접 이끌고 남진하여 백제의 북쪽 변경(邊 境)을 공격하였다. 요동으로 진출하기에 앞서 측후방의 위협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적 포석의 일환이었다. 당시 이 지역의 지배권은 백제에게 있었으나 백제의 진사왕은 광개토왕의 명성 에 겁을 먹고 정면대결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광개토왕은 392년 10월 에 관미성(關彌城 : 경기 파주 오두산성)을 공격하여 20여일 만에 점령하고 남진 정책에 유리한 한강 유역의 지배권을 선언하였다. 진사왕의 뒤를 이은 아신왕은 393년 8월 진무(眞武)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석현 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탈환하는 공격목표를 세웠으나 실패를 거듭하고 결국 백제군은 군량마저 순조롭지 못하자 철수하고 말았다. 2) 아차산성 전투 : 고구려 광개토왕 ↔ 백제 아신왕 ⇒ 작전 결과 : 백제의 화의 요청,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을 볼모로 잡음 광개토왕은 수군을 이끌고 서해해로를 이용하여 임진강 하구로 진출한 다음, 관미성과 아차성(阿且成 : 광진 아차산) 일대의 58개 성곽을 비롯하여 7백여 개 의 촌락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승기(勝氣)를 잡은 고구려군은 여세를 몰아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압박하였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제는 항복과 다름없는 화의(和議)를 요청하여 국왕의 아우 와 대신 10명의 인질과 주민 1천명, 세포(稅布) 1천필을 상납함으로써 작전은 종 료되었다. 3) 몽촌성 전투 : 고구려 장수왕(3만) ↔ 백제 개로왕 ⇒ 작전 결과 : 백제 개로왕 생포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완성하고 정세가 안정되자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증조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도 를 평양으로 천도하면서까지 남진정책을 펴나갔다. 고구려는 장수왕은 475년 3만명의 군사로 백제를 침공하여 국도(國都)인 한성 을 4면에서 포위하였다. 이에 맞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농성전을 전개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