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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101 장방ㆍ관광방ㆍ안국방ㆍ순화방ㆍ준수방ㆍ의통방, 서부의 적선방ㆍ인달방, 중부의 징청방이 지금의 청와대 및 경복궁 일대이다. 1398년 9월 5일 즉위한 제2대 임금 정종(定宗)은 골육상쟁의 피로 얼룩진 경복 궁 근정전의 왕좌에 앉기가 싫었고, 또한 까마귀 떼들이 궁전의 주위를 날며 울 고 근정전(勤政殿) 옥상에 집을 짓는가 하면, 부엉이가 울어대는 등 자연계의 이 변이 계속 일어나 더욱 불안해하던 차에 1399년 2월 26일 서운관(書雲觀)에서 자 주 일어나는 변괴를 피하기 위해서는 흉방을 피해야 한다는 상소로 종척(宗戚)과 중신들이 회의에서 개경으로 다시 환도를 결정, 왕자의 난과 불안해진 민심을 수 습하기 위하여 그해 3월 7일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방원과 세력을 다투었던 태조의 4남 회안군 방간은 박포(朴 苞)와 더불어 개경에서 「제2차 왕자의 난(소위 박포의 난)」을 일으킨다. 이에 신 변에 위협을 느낀 정종(定宗)은 정종 2년(1400년) 11월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 고 만다. 태종 즉위해(1400년) 12월 20일 개경의 수창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다시금 한양 으로 재천도를 결심하여 태종 5년(1405년) 10월 20일 창덕궁으로 이어(離篽)하게 된다. 태종의 창덕궁 건설과 이어는 아마 경복궁에서 있었던 ‘왕자의 난’ 때의 일, 또 그 후의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서 경복궁 입어를 마음속으로 깊이 꺼려한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한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 5백 년의 기초는 확립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도성은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는 9,775보 약 18㎞에 달하는 도성을 498일 만에 축조하였고, 이 도성을 따라 4대문과 4개의 소문19)이 건설되 었으며 종로 네거리에 종각(鐘閣)을 세우고 대종을 달아 밤 10시경 28회의 종을 치면 4대문과 4소문이 닫혔고 새벽 4시경 33회의 종을 치면 4대문과 4소문이 일 제히 열렸다. 도성 내에 대․중․소 3종의 도로를 건설하였고 교량을 총 60개를 건설하였으며, 7개의 성문을 통해 도성 밖과 연결하였고 이 7개의 성문을 통해 전국으로 9개의 주도로를 운용 교통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였으며, 이 도로에 30 리마다 역을 설치하여 540여개의 역이 운용되었다. 주 19) 4대문 : 흥인지문(興仁之門, 현재의 동대문), 돈의문(敦義門, 현재의 서대문), 숭례문(崇 禮門, 현재의 남대문), 숙정문(肅靜門). 4소문 : 광희문(光熙門), 소의문(昭義門), 창의문(彰義門), 혜화문(惠化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