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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전쟁사Ⅰ 수도 서울지역 전례 연구 100 군사연구 제126집 이 때 새 도읍지로 지금의 충청도 계룡산이 물망에 올라 그곳에 도읍을 건설하는 공사가 약 10개월간 진행된다. 그러나 하륜(河崙)과 정도전(鄭道傳), 무학대사(無 學大師) 등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되고 이후 도읍 후보지로 무악(毋嶽)15) 일대가 물망에 오른 적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한양이 수도로 결정된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시로서 육상교통이 편리하고, 해상과 한강은 물자 운반에 편리하며, 북악산․인왕산․목멱산․나산의 내사산(內四山)과 북한산․덕양산․관 악산․용마산의 외사산(外四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 르는 한강은 천연의 요새지로 도읍지로서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태조는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1394년 9월 1일 새 도읍건설을 위한 신도궁궐조 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16)을 설치한다. 그러나 11월 29일 한양에 도착하지만 아직 왕궁이 지어지지 않은 관계로 한양부 객사(客舍)17)를 행궁(行宮)으로 사용 한다. 태조 3년(1394년) 12월부터 정궁인 경복궁을 짓기 시작하는데, 그 위치는 고려 남경에서 약간 내려온 곳, 현재의 청와대 남쪽이다. 경복궁은 고대로부터 군주는 남면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사고와, 풍수지리설의 하나인 백악주산론18)에 따라 백 악산(白岳山 : 지금의 북악산) 아래에 남향으로 건설한다. 또한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로부터 내려오던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景 福宮) 왼편에 왕실(王室)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종묘를 짓고, 오른편에는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을 쌓는다. 궁궐 남쪽으로는 대로 (지금의 세종로)를 내고 그 양쪽에 의정부, 육조, 한성부, 중추부, 사헌부 등 핵심 관청을 배치했다. 태조 5년(1396년) 4월 19일에 도성 한성을 중심으로 성저 10리에 이르는 5부 (東部ㆍ西部ㆍ南部ㆍ北部ㆍ中部) 52방의 행정구역을 정하고 이 가운데 북부의 진 주 15) 현재의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 16)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 : 조선 태조는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左僕射) 김주(金奏),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 중추원(中樞院) 학 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여 새 도읍 한양 건설을 위한 임시 기구를 설 치하였음. 17) 왕이 궁밖에 행차하거나 머물 때, 또는 변란 등에 대비해 지은 임시 왕궁. 18) 백악은 북쪽의 주산이며 그 동쪽 낙산은 청룡, 서쪽 인왕산은 백호, 남쪽 남산은 주작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