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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남미 페루 리마, 홍언의 한국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99 을 맡아 거의 평생을 살았던 ‘홍언(洪焉)’이라는 분이 있다. 홍언의 필명은 ‘동해수부(東海水夫)’이다. 왜 ‘동해 수부’라고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동해’ 에서 배를 타고 다니는 일을 하였을 것이다. 지금까 지 알려지기로는 홍언이 서울의 ‘남부(南部)’에서 태 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동해수부’라고 자신을 칭한 것을 보면, 동해지역의 어느 곳에서 태어나 생활했 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튼, 홍언은 1919년 3월 9일 『신한민보』의 주 필을 맡고 있을 당시, 중국 상하이[上海]의 현순으로 부터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 었다. 이에 홍언은 “3월 1일이 미국 사람의 ‘독립절 일’과 같이 우리의 독립절로 쓰도록 힘쓰고 분발하 여라. 이때에 힘쓰지 않는 자는 곧 대한 독립국 민족 이 아니니 사사(私事) 이익만 생각지 말고 정신과 물 질을 다할 지어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라고 하였다. 홍언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이민자로 미 주에 왔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대부분 농부·노동자·하급 군인·날품팔이 등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 식층은 거의 없었다. 홍언은 그러한 하와이 한인사 회의 몇 안되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원래 이름은 ‘홍종표’인데, ‘홍언’으로 개명하였다. 하와이 한인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사탕수수를 심고 베는 일을 했지만, 홍언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한인 동포 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하와이에서도 한인들을 위한 잡지와 신문이 발행되었는데, 홍언은 이들 잡지와 신문을 만들고 글을 쓰는 일을 주로 하였다. 하와이에 있다가, 1907년경 북미로 와서 공립협 회에 가입하였고,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의 충실한 회원으로 평생을 살았다. 북미에서도 『신한민보』의 기자, 편집, 식자, 논설 등 모든 일을 하였다. 해방 이 후 칠십세까지 『신한민보』를 지켰던 산증인이었다. 홍언이 1919년 화교위원으로 활 동할 당시 사진(이하 사진은 필자  제공) 농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홍 언의 한시 엽서 대한인국민회에서 홍언을 주향부 (籌餉部) 위원으로 임명하는 임명 장(1919년 4월 18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홍 언 에게 발급한 호조[여권](1919년  7월 1일, 대한인국민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