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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 ‘한인비행가양성소’가 창립된, 북가주 윌로우스 99 배양되게 되었던 것일까.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 코, 뉴욕 등과 같은 대도시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북 가주 ‘윌로우스’라는 벽촌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비 행사 양성교육이 이루졌던가? 그 이유는 윌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새크라멘토 계곡에 경제력을 갖춘 한 인 농장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풍부한 재력을 가 진 한인 농장주들의 후원으로 비행사를 양성하여 앞 으로 있을 일제와의 공중전을 준비하고자 했다. 이 처럼 그들이 가진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인비행가양 성소’라는 비행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우리나라의 국경 넘어 한인들의 ‘벼농사’ 한국인의 주식은 ‘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쌀’은 한국인에 가장 중요한 먹거리이다. 19세기 중후반부 터 계속되는 흉년으로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수많은 한인들이 국경을 넘어가 벼농사[水田]를 지었다. 우 리의 국경이라고 할 수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 너면, 인적이 드문 넓은 평야가 있었다. 조선왕조는 ‘월경(越境)’을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굶주림을 면하 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국경을 넘어 청 나 라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그런데, 이곳은 고 대시대에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부여·고구 려·발해에 이르는 10세기 초까지 한민족의 활동영역 이었다. 때문에 한국인들은 ‘고토(故土)’라는 관념이 있었고, ‘간도(間島, 사잇섬)’라고 불렀다. ‘간도’는 오 래 전부터 우리 민족이 살았던 땅이다. 압록강의 대안 서쪽을 ‘서간도(西間島)’라고 했고, 두만강의 북쪽과 서쪽을 ‘북간도(北間島)’라고 했다. 1869년 이른바 ‘기사년 대흉년’ 이래로 서북지방에 연달아 큰 흉년이 들어 기근을 면하려고 압록강과 두 만강 대안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간도와 연해주 로 이주한 한인들은 그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척 박한 땅을 개간하여 볍씨를 심고, 벼농사를 지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외국인토지법’ 한국인들이 캘리포니아에 온 시기는 농업산업 이 확장되던 때여서 농업이 한인의 경제적인 기초 가 되었다. 그 시기에 동양인이 할 수 있던 일은 농 윌로우스 벼농장의 한인 노동자  모집시 임금 광고(『신한민보』 1918년 6월 27일자) 한인비행가양성소 창립과 운영 에 재력을 담당하였던 ‘쌀의 대 왕(rice king)’ 김종림 1909년 국민회 창립 당시 이상설과 임원들(김종림, 둘째줄 오른쪽 에서 두 번째)(앞줄 왼쪽부터 황사용, 정재관, 이상설, 최정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