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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로키산맥의 한국독립운동 중심지, 콜로라도주 덴버 99 협잡꾼 이용호와 오명회 두 사람이 덴버에서 철도노 동 일을 맡아서, 한인 수십명을 고용하여 철도일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명의 악당들은 한인 노 동자들이 피땀 흘려 번 돈 300달러를 받아서 도망을 갔다. 덴버에 자리잡은 박용만과 박장현(박희병)은 일자 리를 찾아 북미로 오는 한인들을 위해 노동주선소와 여관을 운영했다. 한인들에게 일자리와 숙소를 제공 하여 약 300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을 취직시키고,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유학생 등 한인 청년들을 규합 하였다. 미국 서부에서 문양목은 도미 유학생과 소 년들을 설득하여 박용만에게 보내 지도를 받게 하는 등 박용만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런데 박장현이 1907년 6월 10일 위암으로 별 세하였고, 공립협회에서는 구제금으로 2달러를 주 었다. 박장현 사망 이후 박용만은 콜로라도예비학교 (Colorado Preparatory School)에 입학하는 한편, 여관과 노동주선소를 홀로 운영해 나갔다. 박용만, 덴버에서 애국동지대표회 준비 박용만이 덴버에서 노동주선소와 한인 유학생을 지도하고 있던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한국특사 사 건을 빌미로 광무황제(고종)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그리고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 대를 해산시키는 등 국권을 강탈하는 사태가 벌어졌 다. 그리고 미주에서는 1908년 3월 23일 장인환·전 명운 두 의사가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서 친일외 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국권이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이 위험한 지경에 있을 때, 박용만은 1908년 1월 1일 덴버의 애국동지대표회 재무 이상규가 독립의 연금을 수금하여 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 (1919년 4월 3일) 이상규가 독립의연금을 모아 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1919년 4월 5일, 이상 대한인국민 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