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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중국군의 배신과 한국독립군의 중국본토 이동 1933년 10월, 중국군 주보중은 시세영 부대원 약 2개 대대를 동원하여 한국독립군 사령부를 기습적으로 포위하였다 그리고 지청천 총사령 이하 사령부 요원 80여명을 구금한 뒤 다시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독 립 군 부대를 포위하고 전원 무장해제를 강요하였다. 결국 주보중의 배신으로 한국독립군은 장교 등 330여 명 이 체포되어 나자구에 구금되었고, 다수의 대원이 체포를 피해 부대를 이탈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한 국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당하여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국독립군의 위기는 독립지사들의 끈질긴 협상으로 구국군 대리총사령 오의성이 주보중의 음모임을 깨 닫고 주보중 등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함으로써 해소되었다. 한국독립군은 10월 말경에 모두 풀려났고, 압 수 당한 무기도 되찾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독립군은 다시 재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다수의 장병 이 도피한 데다가 항일구국군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깊어져 더 이상 시세영 부대와는 연합작전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다. ▶ 한국독립군, 광복군의 뿌리가 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장개석 정부의 협조로 한국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교육을 받 게 함으로써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한 핵심적인 간부들을 양성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앙육군 군관학교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설치하고 중국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의 주요간부들과 청년들을 중 국관내로 이동시켜 교육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1933년 10월 20일경, 한국독립당 당수 홍진, 총사령 지청천, 부사령 김창환, 중대장 오광선, 공진원 등 한 국독립군 주요간부들과 한국독립군 가운데에서 선발된 군관학교 입학지원자 등 40여명은 중국관내로 먼저 이동하게 되였다. ▶ 한국독립군, 마지막까지 만주동포와 함께 하다. 한국독립군의 주요성원들이 중국관내로 옮겨갔을 때도 마지막까지 북만주에서 한인사회와 함께 항일투 쟁을 전개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독립군 지대장 안태진과 최악 등이 거느리는 독립군이 호림, 요하현 등 우수리강 지역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며 중국본토로의 이동을 거부하고 완강하게 대일항전을 계속하였 던 것이다. 동녕현성 전투 유적지에 시세영, 주보중 등 중국인 동상, 항일기념관과 공원을 조성하였으나 한국독립군의 참전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