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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봉장이 되 었다. 1911년 10월 의병 지휘권을 한정 만에게 위임하고, 조맹선과 함께 압록 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이르러 박장 호·윤세복·조맹선·홍범도 등과 같 이 포수단을 조직하였다. 1918년 1월 조맹선·황봉신·차도 선(車道善)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社) 라는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만주로 망명해오는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며 계몽운동 에 주력하는 한편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 한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이며 국내진격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진룡 장군은 만주에 분산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 기 위해 활동하던 중 친일밀정 임곡(林谷)의 밀고로 청산구 자루골에 서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순국한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우씨는 옥중의 부군(夫君)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몸도 곧 목숨이 다할 것이온 즉 그때에 낭군의 묘 곁에서 뵈오리 다”라고 약속한 대로 청산구 구대구(자루골)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부군의 뒤를 따랐다. 관전현 하로하, 양기하 선생 순국 유적지 양기하(梁基瑕) 선생은 충남 공주군수로 재직하던 중 경술국치를 맞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독립항쟁에 투신하였다. 대한독립 단 도총재 박장호 등 의암(毅菴) 유인석의 문인들과 함께 교육사업 에 종사하면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의부 교육위원장을 거쳐 국민부 창설에 참여한 양기하는 양세봉(梁世奉)·고이허(高而虛) 등과 조선 관전현 청산구 소아하 강변 이진룡 기념원, 부인 우씨 묘비와 의열비 이진룡 장군 기념비 관전현 하로하향 연강 양기하 선생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