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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주(吳錫柱)는 전남 고흥(高興) 사람이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한 뒤 1919년 4월 14일 고흥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워가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가 고흥의 만세운동에 착수한 것은 목치숙(睦致淑)과 함께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온 4월 초부터였다. 이 때 그는 손재곤(孫在坤)·최세진(崔世珍)·조병학(曺秉學)·이석완(李錫琬) 등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이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 한편 만세시위에 사용할 선언서를 작성하고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거사 당일을 맞았으나,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는 관계로 시위군중이 예정대로 모일 수 없었으므로 거사를 미룬 채 선언서를 일제 관청에 발송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6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25일 대구복심법원과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순천성경학원(順天聖經學院)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서 신학(神學)을 수학하고 목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그의 항일투쟁은 특히 1930년대 이후 일제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면서 그에 대한 거부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신사참배 강요는 일제의 한국 강점 이래 지속된 것이었지만, 1931년 만주침공 이후 심해졌으며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민족말살을 획책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 무렵 기독교계는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1938년 2월 금산면(錦山面) 금천교회와 도양면(道陽面) 중앙교회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하였다. 그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신을 우상(偶像)으로 여기는 것이므로 절대로 신사에 참배하지 말라"고 신도들에게 역설하면서 기독교정신을 굳게 지켰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불경죄(不敬罪)로 징역 10월과 또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2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부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