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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로키산맥의 한국독립운동 중심지, 콜로라도주 덴버 97 手)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이듬 해 4월 관직에서 물러나 평남 순천군에서 사립시무학교(私立時務學 校)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제1차 멕시코 조사위원을 파견했다가 실패한 상 동청년회에서는 다시 여비를 마련해 박장현을 멕시 코로 보냈다. 박장현은 1905년 12월 31일 미국 워싱 턴과 뉴욕을 지나, 1906년 1월 24일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박봉래와 신현규 등 6명이 유카탄의 농장을 탈출해 은신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박장현은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에 가서 실상을 파악하지 않고, 멕시코시티에서 농장 탈출 자, 미국인 여행자 중국상인 등을 통해 한인 이민의 참상을 조사하고, 1906년 2월 23일자로 상동청년회 에 보고했다. 그는 멕시코시티에서 여비가 부족하고 위험하다고 느껴 유카탄으로 가지 못하고 미국 덴버 로 와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한말 애국지사 박용만의 한인 노동주선소와 여관 박장현의 조카로 한말 애국지사 박용만(朴容萬) 이 있다. 박용만은 이승만·정순만과 함께 근대 민족 운동과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했던 인사들로, 이들 3 명 모두 이름이 ‘만’자로 끝나기 때문에, ‘3만’이라 고 하였다. 한말 ‘3만’이라고 하면 애국지사의 대명 사로 불려졌다. 박용만은 1905년 2월 샌프란시스 코에 도착했고, 그해 9월 숙부 박장현과 네브라스카 주 커니(Kearney)로 떠났다. 멕시코에서 한인 이민 자들의 조사를 마친 박장현은 1906년 2월 미국으 로 돌아왔다. 박용만은 숙부 박장현과 함께 1906년 여름 콜로 라도주 덴버에 자리를 잡았다. 박용만과 박장현이 덴버로 근거지를 옮긴 것은, 이 곳의 탄광과 철도회 사에서 많은 노동자를 모집하고 있었고, 사탕무농장 이 호황을 맞이하여 많은 인력을 취직시킬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당시 덴버의 경제적 실상에 대해서 애국동지대표회 발기취지서(『공립신보』 1908년 3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