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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북가주의 한국독립운동 중심지, 새크라멘토 97 후원하는 김종림의 벼농사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그래서, 그해 12월부터 김종림 등 한인 후원자들의 재정적 지원이 없어지면서 한인비행가양성소는 사 실상 폐쇄되었다. 만일, 북가주 한인 재력가들이 새크라멘토 계곡에 서 대홍수 피해없이 지속적으로 대규모 벼농사를 지 었다면, 한인청년들이 계속해서 한인비행가양성소 에서 비행술을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 에서 양성된 한인 비행가들은 원동으로 파견되어 일 제와의 공중전을 준비하는 독립군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인비행사 박희성,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참위 노백린 장군의 윌로우스 한인비행가양성소는 1920년 12월 운영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폐 쇄되고 말았다. 비행가양성소가 폐쇄된 이후 이곳에 서 비행술을 연마하던 학생들은 다시 다른 비행학교 로 가거나 혹은 학업을 포기하였다. 1921년 1월 박 희성(Howard S. Park)과 홍종만은 윌로우스 비행학 교에서 교육을 받고, 새크라멘토 비행장에 들어가 비 행술을 연습하였다. 3월에는 이용근과 정몽룡도 새 크라멘토 비행학교로 와서 비행술을 연마하였다. 박 희성의 비행술은 너무 뛰어나 한인학생들 뿐만 아니 라, 미국인들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박희성은 새 크라멘토 비행장에서 경비(經費) 없이 비행술을 공부 하고, 항공면허를 받기 위해 레드우드시 비행학교에 왔다. 레드우드시 비행장에서 항공면허시험을 치르 는데, 마지막에 6천 피트를 오르다가 비행기가 고장 나서 3백 피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가 면허시험 을 보던 비행기는 완전히 파손되고 박희성은 30분간 기절했다가 깨어났으나, 아래 부분을 크게 다쳐 샌 프 란시스코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면허시험을 치르지 못했던 박 희성과 이용근은 1921년 5월 22일 새크라멘토 비행 장에서 다시 면허시험을 치렀고, 7월 7일자로 국제 항공증서를 발급받았다. 국제항공증서를 획득한 박 희성과 이용근은 7월 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비행병 참위(현재의 소위)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에서 박희성과 이용근 두 사람을 비행병 참위로 임 명한 것은, 임시정부의 군인으로 정식 임명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3 · 1독립선언서」 영문본을 미국으로 가져온 V. S. 맥클래치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는 새 박희성의 국제비행사 면허증(앞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