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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한인사회 양대 지도자 석주 이상룡 선생, 규암 김약연 선생┃95 북만주 한인사회 최고지도자 김약연 선생 김약연(金躍淵)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에서 출생 하였다. 선생의 호는 규암(圭巖)이다. 김약연 선생은 1899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 만주로 망명한 다음 북간도 용정에 자리를 잡 고 명동학교와 간민교육회를 설립하여 나라없이 만주로 온 동포들의 교육과 자치활동의 지 도자로서 북간도 일대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1899년 2월 18일 김약연은 함경북도 종성에서 김정규(金定圭)·문정호(文政鎬)·문치정 (文治政) 등 10여 가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으로 이주하여 명동촌이라고 하는 한인촌을 형성하여 갔다. 김약연 선생은 한인촌을 개척하면서 후세교육을 위해 1901년 4월 명동촌 일대 5만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학전(學田)을 삼고, 이를 장학재원으로 하여 규암재(圭巖齋)라는 사설 교육 기관을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청년들을 모아서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공부를 시키 며 각종 교육 계몽 사업을 벌여 한인동포들의 자조자립과 협동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적 일체 감을 조성하며 북간도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 북간도 한인자치단체 간민회를 이끌다 1912년 이동휘가 명동으로 망명해 온 것을 계기로 김약연 은 이동춘·정재면·김영학·박찬익 등과 함께 1913년 4월 간민교육회를 간민회로 확대 발전시켜 북간도 한인동포들의 공식적인 자치기관으로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김약연은 간민회의 회장을 맡아 본부를 국자가에 두고 연 길·화룡·왕청현 등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한인동 포들을 관장하였다. 즉 간민회는 한인동포들에 대한 호구조 사와 교육계몽사업과 함께 북간도 한인자치 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1919년 2월 25일 북간도 한인대표로 러시아 니콜스크에서 열리는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 후에 대한국민의회로 개칭)에 참석하였다. 1919년 3월 간도 용정의 만세사건과 명동학교의 전소사태가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각료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간도로 돌아오던 중, 중국 정부에 연금 되어 연길 감옥에서 3년간 구 금당하였다. 김약연 선생이 명동촌에 설립한 명동학교 북간도 항일투쟁의 중심도시 용정의 전경 명동촌에 건립한 김약연 선생 기념비 (길림성 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