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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2회) • 황해도 신천의 만세시위 (1) 97 었다. 송화교구장 손두순은 붙잡혀 징역 1년, 백규하 와 최윤조는 징역 6월에 처해졌다. 신천 천도교구장 최흥숙은 3월 7일 최운학(崔雲 鶴), 이윤식(李允植), 최운용(崔雲龍)과 3월 11일 신천 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의견 불일치 로 시간만 끌다가 4월 1일 신천군 헌병분견소에 체 포되었다. 그러는 사이 3월 10일을 전후하여 신천 각 지에서 만세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 퍼져가기 시작 했다. 3월 10~11, 14, 16일 문화면 문화면은 일제에 의해 1914년 신천군에 병합되기 전에는 문화군이었다. 신천군 최초의 시위가 문화면 에서 시작된 것에는 이런 지역적 ‘굴욕’이 배경에 있 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장관 신응희(申應熙)에게 3월 10일 새벽 2시 “신천도 위험하다.”는 보고가 올라왔 다. 그 전날 문화면 동각리에서는 3월 9일 곡물상 문 창규(文昌奎)가 서정리 최효식(崔孝植) 외 6명과 함께 태극기 200여 개를 만들었다. 이런 움직임이 감지되 었던 것 같다. 3월 10일 문창규, 최효식, 허응숙(許應俶) 등은 군 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주도자들이 헌병대에 구금된 것 같다. 이튿날인 3월 11일 동각리 문화시장에서 포목상 강성모(康成模), 방형묵(方亨默), 잡화상 강영탁(康榮 鐸), 최재준(崔載俊) 등이 기독교회 조사(助事) 최현식 (崔賢植), 임도성(林道成) 등과 함께 기독교인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태극기를 흔 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문화 헌병주재소 앞 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검거된 사람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주재소 헌병들이 굴복했다. 일 제 경무기관이 시위대의 요구에 순응하여 검거했던 사 람들을 풀어준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문화면민들 의 결속력이 강력했음을 말해준다. 전날 구금된 사람 이 풀려나고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일제는 재령 헌병분대에서 헌병 3명, 추가로 보병 도 파견하여 시위 주도자 및 참여자 색출에 들어갔 다. 다시 29명이 검거되었다. 신응준 황해도장관의 보고가 문화면 시위 성격을 잘 말해 준다. ➊ 황해도(현재 황해남도) 신천군 지도 ➋ 신천군 3 · 1만세운동 지도 ➊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