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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érence de la Paix)를 개최하였다. 한국 독립운 동가들도 이 국제회의를 우리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프랑스 파리로 가 려고 하였다.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 을 파리평화회의 대표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프랑스 우편선 포르토 스(Porthos)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13일 파 리에 도착하였다. 파리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김 규식은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을 상대 로 외교활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한국 독립을 대외 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파리에 한국통신국(Bureau d'information Coréen)을 설치하였다. 한국통신국에 서는 「 통신전(通信箋, Circulaire)」 을 1919년 4월 10 일부터 1920년 12월 15일까지 총 23호를 발행하였 다. 「 통신전」 제1호에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들 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한국민들이 만세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프랑스에 있는 각국 대표들에게 알렸다. 파리에서 외교활동을 펼치던 김규식은 4월 7일 중 국 상하이의 현순으로부터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이제부터 ‘신한청년당’의 대표가 아니라,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의 파리 대표(Delegate at Paris)’가 되었다. 현순의 전보를 받 고 김규식은 공식적으로 ‘임시정부의 파리대표’가 되 어, 정식으로 ‘독립청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임시정 부가 성립되었고 자신이 정식으로 대한공화국 임시 정부의 파리대표로 임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서둘 러 ‘파리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게 되었다. 김규식은 1919년 4월 14일 파리 9구 샤토덩 (Rue de Chateaudun) 38번지에 정식으로 ‘한국민 대표관’을 설치하였다. 한국민대표관은 프랑스어 로 ‘La Mission Coréenne Paris’, ‘Comite National Coréen’, ‘Mission De La République Coréenne A Paris’ 등을 사용하였다. 김규식은 5월 12일 프 랑스어로 작성한 「독립청원서(Pétition)」와 「비 망록(Mémoire) 」을 파리평화회의 의장 클레망소 (Clémenceau)에게 정식으로 제출하였다. 한국대표 단(DélégationCoréenne)의 명의로 파리평화회의 에 제출한 「 독립청원서」 의 프랑스어 제목은, 「 평화회 의에 제출한 한국대표단의 사유서(Exposé présente la Délégation Coréenne à la Coférencede la 한국민대표관 서기장 황기환 편지(1925.1.22) 미국 뉴욕에 있던 황기환 묘소. 올해 4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 장 되었다.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 김규식 · 서영해 · 황기환 등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