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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② 97 쉬움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오후에 종기씨 및 김흥한 과 함께 30리를 가서 두솔원(兜率院)에 투숙하였다. 7일 잠깐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10여 리를 가 서 풍산들의 주막에서 김흥한과 작별하였다. 오정 무 렵에 하회에 도착하니, 사돈 류세현(柳世賢)이 이미 내 가 고국을 떠날 뜻이 있음을 알아 대화를 나누는 사 이 가끔씩 간도의 사정에 대해 언급하였다. 대개 그 일족인 준영이 장사의 일로 안동(안동; 현재 중국의 丹東, 신의주 건너편 도시) · 봉천(奉天) 사이를 왕래하 였으므로 그곳 소문을 제법 들은 것이 있다고 한다. 8일 아침 먹은 후 출발하려고 하는데 류실(柳室= 석주의 여동생)이 정에 약하여 눈물을 흘린다. 동전 여 섯 꿰미를 주며 달래었다. 종기씨와 천천히 걸어 재 넘 어 구담에서 잠시 쉬었다. 9일 상주 인봉에 도착하여 강벽오(姜碧梧. 석주 의 사위인 강남호의 조부) 어른의 영위에 곡하고 물 러나와 사돈 형제와 회포를 나누었다. 10일 노복과 말을 돌려보내고 오후에 출발하겠 다고 알렸더니, 강실(姜室=석주의 외동딸)이 눈물바 탕을 하며 진정하지를 못한다. 은전 2원을 내주며 나 중 만날 기약이 머지않으리라고 따뜻한 말로 타일렀 다. 종기씨 등과 더불어 30리를 가서 신촌(新村)의 객 점에 유숙하였다. 이날 밤에 눈바람이 크게 일었다. 11일 추풍령에 이르러보니, 낮 기차가 이미 떠나버 렸다. 정거장 남쪽 개울가의 작은 주막에 기숙하였다. 12일 오전 2시에 경부선 직행 기차를 타다. 을사 년(1905)에 부상(扶桑=현 김천시 개령면 부상리)으로 ➊ 임청각에 살았던 고성 이씨 가문의 선조 이종악(1726~1773)의 문집 『허주유고』에 실린 「동호해람」. 당시 임청각과 주변의 낙동강 전 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➋ 송기식(1878~1949)의 회갑연 사진(경북매일 제공). 그는 1913년 안동 송천동에 설립된 봉양서숙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8일 3 · 1운동 때 안동면 2차 시위를 계획하고 이끌다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➊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