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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4년 12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덴버를 거쳐 시카고로 가고, 또 동부의 뉴욕으로 간 다. 이렇게 덴버는 미국 서부와 동부를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북미지역의 한인들은 대부분 하와이 이민자들이 었다. 물론, 그 전에 인삼장수들과 유학생들도 있었 지만 소수에 불과하였다. 『공립신보』 1906년 12월 22일자 기사에 의하면, 1906년 말에 북미에 온 한인 들은 약 1,300여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 인 노동자들은 철도와 광산, 과일·채소 농장, 서양여 관과 집에서 청소와 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 외 대학 생이 6명, 보통 학생이 70명, 야학생이 100여 명이 었다. 콜로라도 덴버에 한인들이 언제부터 왔는지에 대 한 자료는 없다. 덴버가 도시로서 개발되고 금광이 발달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아마도 그때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고려인삼을 팔았던 한인들이 처음으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인 철도·광산 노동자들과 한인 고려인삼 장수들이 같이 살았다. 멕시코 한인의 진상 조사위원 박장현, 덴버에 정착 1905년 멕시코로 이민을 간 1,033명의 한인들이,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에서 인간 이하의 참혹한 학대 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서울의 상동청년회에서는 박장현(이명 박희병)과 이범수를 조사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1905년 8 월 25일 국내서 출발했으나 이범수가 중국 상하이에 서 병이나 돌아왔고, 박장현은 홍콩에서 여비가 부 족해 귀국했다. 원래 박장현은 서울에서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게이오기주쿠(慶 應義塾)에 유학했다. 그후 1896년 의친왕(義親王) 이 강(李堈)과 버지니아주 로아노크(Roanoke) 대학에 서 2년간 수학하였다. 로아노크대학에서 2년간 예과 (Sub-Freshman Course) 수업을 받았고 미국에서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1899년에 농상공부 기수(技 네브라스카 커니·헤이스팅스에서 ‘한인소 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대조선국민단  단장 시절 사진) 숙부인 박장현(박희병)과 함께 노동 주선소와 여관을 경영한 박용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