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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4년 9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행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레 드우드시 비행학교를 방문했으며, 한인청년들이 군 단에 참가하기 위해 2월 19일 시카고를 떠나 2월 24 일 새크라멘토에 도착했다. 노백린은 레드우드시 비행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한인 청년들과 한인비행학교 창설에 대한 의견을 나 누고 비행학교 설립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노백린 의 군단 설립은 김종림과 협의하여 일사천리로 진행 되고 있었다. 노백린은 비행군단 설립을 위해 새크 라멘토에서 열성적으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윌로 우스 데일리 저널』 1920년 3월 1일자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노백린은 “(비행)학교에 필요한 교원과 비행 기가 갖추어지면 곧 설립될 것이다. 그것의 목적은 일본으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얻기를 원하는 한인 청 년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데에 있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비행학교 설립이 결정된 이후 노백린은 비행장 건 설을 위해 1920년 3월 3일 새크라멘토를 떠나 윌로 우스로 왔고, 천막에서 생활하면서 비행학교 설립 에 몰두했다. 비행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가장 필 요한 것은 학교와 비행장의 부지를 구입하는 것이었 다. 비행학교 설립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전적으로 김종림이 담당하였다. 김종림과 그의 부인 백 엘리 스(Back Alice)는 벼농사에서 벌어들인 자금을 비행 가양성소 설립에 사용하였다. 40에이커에 달하는 토 지를 구입하였고, 비행학교의 건물은 1918년에 폐 교된 퀸트 학교의 건물(Schoolhouse)을 임대하기로 하였다. 노백린은 교육용 비행기 두 대와 교관 등을 갖춘 이후 1920년 7월 5일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정식으 로 개교하였다. 비행가양성소 개소와 함께 이를 운 영할 ‘비행사양성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비행 사양성사는 실제적으로 비행학교를 운영하는 주최 로서, 학교 운영의 모든 재정적 책임을 전담하였다. 비행사양성사는 재정적으로 절대적으로 공헌한 김 종림이 총재를 맡았고, 윌로우스 지방의 한인 재력 가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0년 가을부터 시작된 대홍수가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재정적으로 윌로우스 한인비행가양성소 교사(校舍)(1920년 당시) 윌로우스 한인비행가양성소 학생과 교관(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