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page

96 2024년 8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乙未事變, 1895년)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반일감정 이 격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불꽃처럼 일 어났다. 민족혼을 일깨우다 백암은 이처럼 나라의 정세가 암울하던 1898년 (고종 35년), 서울로 올라와 『황성신문(皇城新聞)』(사 장 남궁억)의 주필을 맡아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그는 논설을 통해서 일본의 침략정책을 날카롭게 비 판함으로써 민중들에게 항일사상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백암은 서구열강과 주변의 강대국들이 치 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경쟁사 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 을 민중들에게 일깨워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특히,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강한 국 가 만이 살아남는다’는 교훈을 민중들에게 심어주려는 데 주력하였다. 그래서, 백암은 교육을 통한 민중의 계몽이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지름길이라고 굳게 믿 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지는 못하였다. 백암은, 1905년(고종 42 년) 11월 17일, 일본이 강제로 을사오조약(乙巳五 條約)을 체결하고 우리나라를 피보호국으로 만들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서 이를 맹 비난하였다. 그 후, 1906년(고종 43년) 『서우(西友』 (서우학회) 제1호에 “교육이 불흥(不興)이면 생존을 부득(不得)”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교육을 통한 민중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짐 작된다. 1908년(순종 2년), 백암은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 를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여, 그 회 장에 취임하여 학회의 기관지 『서북학회월보』를 창 간, 매월 애국계몽사상에 입각한 논설을 발표하였 다. 특히, 『서북학회월보』 제7호에 논설 “의무교육 실시”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창의성이 요구되 는 과학적인 교수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서 무한경 쟁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백암의 교육사상은 1904년(고종 41년)에 출간한 『학 규신론(學規新論)』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교육사상은 백암이 한성사범학교 교사, 오 성학교(五星學校) ·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교장 으로 재직하면서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 라, 그는 중국 상해 망명지서 신규식 · 이찬영(李瓚榮) 등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젊은이들 박은식이 1912년 10월에 보낸 한문 편지 1920년 12월 28일 상하이에서 열린 이승만 임시 대통령 환영식. 가 운데가 이승만, 오른쪽 세번째가 박은식(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