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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만주벌의 별이 되어 석주 이상룡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항일독립항쟁에 전생애를 바치다 1925년 3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국무 령을 선출한 결과, 이상룡 선생이 초대 국무령 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9월, 이상룡은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 후, 그 동안 남만주와 중국대 륙에서 항일 투쟁에 크게 활약한 김동삼, 오동 진,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이유필 등을 국무위 원에 임명했으나, 이들 중에는 동포가 절대 다 수인 만주를 떠나서는 국권회복을 할 수 없다고 거듭 사양하여 처음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서간도로 돌아온 이상룡 국무령은 환인현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지도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 변 후, 흑룡강 성 오상현에 서 신흥무관 학교 교장 여 준과 대한독 립군단 참모 총장 이장녕이 마적들에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만 곡기를 끊었다. 1932년 5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길림성 서란현 소과전차촌에 서 서거하였다. “내가 늙은 몸으로 허영에 몸을 굽히는 것은 평소의 기대에 어긋나는데, 그래도 한번 움직 인 것은 오직 내분을 조정 통합하기 위한 것뿐 이었다. 이제 이 희망이 없으니 어찌 이 자리에 머물겠는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사임하며 - 석주 이상룡 은 마침내 스스 로 사임하고 항 일 무 장 투 쟁 을 계속 하기 위해 만주로 돌아왔 다. 이상룡 선 생의 춘추 68세로 이미 숙환을 얻어 대신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를 독립운동 일선에 나서 게 하였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부민단을 이끌며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여 독립군 장병을 양성하였던 합니하 유적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추모제 “내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 효도로 몸 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되니, 우선 이곳에 묻어 두 고서 때를 기다리도록 하라. 조국이 광복 되거든 내 유해를 유지에나마 싸서 선산 발치에 묻어라.” 석주의 저술로는 〈한만관계사〉(1911), 〈경고 남만주교거동포〉(1913), 종래의 화이관을 비판 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한 〈존화양이변〉(1914),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술하여 신흥학교의 교과 서로 사용한 〈대동역사〉(1921)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러 나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공적에 합당한 서훈이 아니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 (1920년대 상해 황포탄의 모습)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이상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