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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3년 10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진주만 공격을 사전에 미국정부에 경고한 것이다. 1941년 3월 그는 미일전쟁의 군사계획을 드러낸 『삼국동맹과 일미전(How Japan Plans to Won)』 (松尾樹明 著) 사본과 영어 번역본을 국무부와 육군 부에 보냈다. 그리고 그해 10월 헐 국무부장관과 스 팀슨(Harry L. Stimson) 육군부장관에게 12월 내지 다음해 1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 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진주만 공습 3일 전에 국 무부 맥스웰 해밀턴에게 전화로 일본이 금주에 공 격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12월 6일 국무 부를 방문하였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 가 개최되어, 미주지역 최고기관인 재미한족연합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승만을 대미외교위원으로, 한길수를 국방공작봉사원으로 선임했다. 재미한족 연합위원회에서는 외교를 담당할 주미외교위원부 를 두고 그 책임자로 이승만을, 한길수를 국방공작 봉사원에 임명하여 외교활동을 뒷받침하게 하였다. 한길수는 충칭의 좌파세력인 조선민족혁명당 및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노선과 활동을 선전하였는데, 1942년 2월 재미한족연합회 선전위원 및 국방공작 봉사원에서 해임되었다. 그해 7월 10일 그는 조선 민족전선연맹 및 중한민중동맹단 대표 명의로 「 동 포 · 동지에게 고함 」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 길수는 1942년 상반기까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이 승만 보다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중한민 중동맹단,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전선연 맹의 워싱턴 대표임을 내세우며 사사건건 이승만의 활동에 마찰을 빚어면서 외교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1942년 중국 충칭의 김원봉은 한길수를 조 선민족전선연맹 미국 전권대표로 임명했고, 1943 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워싱턴 대표로 임 명하였다. 한길수는 이승만과 충돌하였으며, 중한 민중동맹단을 중심으로 미국의 조야에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용중의 『한국의 소리』 김용중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과일 도매상으로 성 공한 사업가이다. 1928년 5월 김용중은 송철과 함 께 과일과 채소를 위탁 판매하는 ‘케이 앤드 에스 자 버(K & S Jobber: 김용중·송철 도매상)’를 설립해 본격적인 사업가로 뛰어들어 크게 성공하였다. 그 러면서 자연스럽게 중가주 리들리에서 과일 농장과 판매로 성공한 김형순·김호와 밀접하게 교류하며 사업의 동반자이자 독립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또 한 김형순의 맏딸 메리 앤 김(Mary Ann Kim)과 결 혼하게 되었다.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의 결과로 미주한인사 회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인 재미한족연족연합위원 회가 결성되자, 김용중은 연합회 집행부 위원 겸 선 전과장이 되었다.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한국의 독립문제가 미국에서도 큰 관심 사로 부각되자, 1941년 12월 워싱턴으로 건너가 본 격적으로 선전활동을 벌였다. 김용중은 1943년 9월 워싱턴에 한국 독립문제를 본격적으로 선전·홍보하기 위해 비영리 기관으로 ‘한국사정사(Korean Affairs Institute)’를 설립하고, 11월 22일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라 는 반(半) 월간의 영문 잡지를 발간했다. 한국사정 사는 1975년까지 존속했고, 『한국의 소리』는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