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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이(韓興履 1897~1979) 한흥이 지사는 호계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19년 경성 고보 재학시 3.1독립운동을 맞아 탑골공원에서 동료들과 함께 독립 선언문 낭독 및 시흥, 안양, 군포 전역에 독립선언문 분배와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5일에는 동료 31명과 제2의 시위운동에 참여, 남대문역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수백 명의 군중과 시내로 행진하다 붙잡혀 경성법원에서 3년형의 언도와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 안양직물회사와 소사공업고 등학교, 부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으며, 1979년에 운명하셨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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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천(李在天 1913~?) 이재천 지사는 시흥군 동면 출신으로 1919년에 독립지사인 부친 이용환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0년 조소앙 선생의 지도하에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화랑사를 조직, 「화랑보」를 발행하였으며 1931년에는 김구 선생 지도하에 한국상해 소년동맹조직위원장에 취임, 월간지 「새싹」을 발간, 상해와 조선내 발송 및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후 임시정부의 밀명으로 인천으로 입국 하다 일경에 체포, 5년을 선고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되었다. 그러나 수형기록표의 5년 만기 기록은 있으나 정확한 사망일자와 시신이 없어 고문에 의한 옥사로 추정되고 있다. 1991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서울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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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李在賢 1917~1997) 이재현 지사는 시흥군 동면 출신으로 1919년에 부친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18세인 1935년 김구 선생의 특명으로 일본군내 한국인의 포섭등 공작활동을 하였으며, 1937년에는 홍콩에 파견 되어 상해 지하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10월 김구 선생이 주도한 한국청년 전지공작대의 조장으로 항일활동을 펼쳤으며, 1940년 태행산전투에 참전하여 적후 공작과 함께 광복군 제2지대 간부로 임명되어 군사훈련과 정보활동을 하였다. 1944년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대 무전훈련을 받고 1945년 8월 국내 정진군의 본부요원이 되어 국내침투 공작활동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이 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97년 안양에서 운명하셨다. 묘는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