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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향산 이만도, 자정순국의 길을 걷다 95 거사일로 결정하고, 일본 공사관에 관련자들을 불러 놓고 실행방안을 검토하였다. 암호명 ‘여우사냥’ 작 전이 개시되었다. 궁궐 뒤편의 황후 침실인 옥호루 (玉壺樓)로 난입하여 왕비를 참살하였다. 이를 ‘을미 사변’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반일감정이 격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특히 이 소식을 들은 이만도는 비분강개하였다. 이 때, 선성(宣城, 현재의 예안)에서도 통문이 돌았 다. 진성이씨(眞城李氏) 문중이 중심이 된 통문이었 다. 이만도가 선성의진의 의병장에 올랐다. 그러나, 의진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로써, 그는 백 동서당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1905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 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들이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통째로 넘겨주었다. 이를 ‘을 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이름 한다. 이에 따라 나라 의 숨통이 끊어지더니, 1910년(순종 4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만도는 아버지가 준 ‘관인(官人)의 길’을 떠올렸 다. “…… 위급함을 보면 마땅히 목숨을 바쳐라 . ” 9 월 17일(음력 8월 14일), 그가 자정(自靖)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필자의 가슴에 찡하게 다가 온다. “하루 죽지 못하면 하루 죄인이 되고, 이틀 죽 지 못하면 이틀 죄인이 된다.” 10월 10일(음력 9월 8 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국의 길에 들었다. 향년 69세였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향산 이선생 순국유허비’ 비각과 비석(오른쪽, 장호철 제공). 안동 시 청구동(예안면 인계리) 길가 ‘향산공원’에 있다. 비문은 위당 정 인보가 한문으로 글을 짓고 백범 김구가 비문의 제목을 썼다.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오른쪽, 경북매일 제공). 안동시 도산면 토 계리 하계마을 입구에 세워졌다. 이 마을에서 이만도와 이중언, 이육 사 등 모두 25명의 독립지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