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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백암 박은식의 삶과 불멸의 민족혼 95 메이지유신(明治維 新)을 통해서 서구 (西歐)의 선진한 문 물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보다 앞서 개화(開化)에 눈 을 떴다. 이처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우리 조정 에 통상을 요구하거나 꾸준히 침략의 손길을 뻗어왔 다. 1875년(고종 12년) 9월, 군함 운요호[雲揚號]의 불법침입으로 야기된 조 · 일 양국의 군사충돌이 있었 는데, 일본은 이 충돌의 책임을 우리 측에 씌워 무력 으로 강압, 개항을 강요함으로써 그 결과 강화도조약 (1876년)을 체결하고 정치적 · 경제적 세력을 우리나 라에 침투시켰다. 한편, 1894년(고종 31년) 2월 동학농민봉기가 일 어나면서 나라가 참으로 어수선하였다. 이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거하여 농민들 이 고부관아를 습격함으로써 발단되었다. 이 때, 조 정에서는 관군의 힘만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 다고 판단, 청(淸) 나라의 원군을 끌어들이면서 새로 운 비극이 시작되었다. 청 나라의 군대가 파견되자 일본이 천진조약(天津條約, 1885년)을 구실로 서울 에 군대를 입성시키면서, 우리나라가 청 · 일 두 나라 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때, 동학농민군은 진압되었지만, 청 · 일 두 나라의 군대는 철수를 거부 하였다. 우리 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 에 놓이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 때, 일본은 청 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 를 확보해가면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 획을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1894년 7월 23일(음 력 6월 21일)에 일어난 갑오변란(甲午變亂)은 이러한 계획에서 출발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이에 머물지 않 았다.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를 공사(公使)로 조선 에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새로운 국면을 모색케 하였 다. 미우라는 군인 출신으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서, 외교의 경험은 전무한 자였다. 그는 서울에 부임 한 후 1개월여를 칩거하면서 일본의 대(對)조선정책 의 걸림돌인 ‘명성황후(明成皇后) 제거’의 음모를 꾸 미고 있었다. 그는 10월 8일(음력 8월 20일)을 거사 일로 결정하고, 일본 공사관에 관련자들을 불러 놓 고 실행방안을 검토하였다. 암호명 ‘여우사냥’ 작전 이 개시되었다. 궁궐 뒤편의 황후 침실인 옥호루(玉 毫樓)로 난입하여 왕비를 참살하였다. 이를 을미사변 2015년 10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앞에 세워진 박은식의 흉상(연합 뉴스 제공) 백암 박은식(1859~1925) 박은식이 1900년대 초 교관으로 재직했던 한성사범학교 전경(한 국 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