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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 미주 한인의 첫 도착지 · 출발지,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지 호놀룰루 95 시작해 나중에는 300여명에 달했다. 일제의 정보자 료에도 사관학교의 생도수는 1915년 3월 말 현재 약 280명이었고, 이들 가운데 75명이 광무군인 출 신이었다고 한다. 대조선국민군단의 군영은 호놀룰 루시의 동북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강 을 낀 계곡에 군영이 위치했으므로, ‘산넘어 아희들’ 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박용만은 사관학교 생도 들을 ‘우리 독립군’이라고 불렀다. 박용만은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의 사령부를 두고, 중국령과 러시아령 등지에 대조선국민군단의 지단(支團)과 사관학교를 설립한다는 원대한 구상 을 하였다.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 를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했지만, 1916년을 고 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에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 한인들의 3·1운동 1919년 3월 9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던 현순 (玄楯)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전보 로 알렸다. 현순이 보낸 3 · 1운동 발발 전보는 하와 이에 3월 9일 새벽 12시 53분에 도착했고, 오전 10 시 국민보 기자 승룡환이 전보를 받아서 하와이지 방 총회장 이종관에게 전화로 알렸다. 그리고 현순 이 보낸 영문전보의 번역문은, 『국민보』 1919년 3 월 12일자에 번역되어 실렸다. 현순의 전보를 받은 이후 국민공동회가 소집되었 고, 호놀룰루에 있는 국민회 회원 500여 명과 학생 들 100여 명이 모였다. 하와이 국민회와 한인들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였다. 의연금 수전위원을 각 지역에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으며, 호놀룰루에 있는 부인들도 공 동회를 개최하여 238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1919 년 3월 26일자 『국민보』에 실린 독립운동비 모금액 은 호놀룰루에서 482달러, 와히아와에서 67달러, 모두 549달러였다.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진 이후 하와이의 한인단체 와 기관들은 거의 매일 국민회 총회관에 모여 3 · 1 운동 이후의 운동방향에 대해 토의를 계속하였다. 하와이 국민회에서는 이러한 한인들의 열기를 결집 하기 위한 행사를 갖기로 하고, 4월 12일 카이무키 스트리트(Kaimuki Street)에 있는 한인기독학교에 서 축하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독립축하식 행사를 위해 하와이의 한인들은 한복을 착용하고 손에 손 에 태극기와 미국의 성조기를 들고 밀러가(Miller Street)에 있는 국민총회관에서 모였다. 이후 대오 를 이루어 전차를 타고 카이무키에 있는 행사장에 모여 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호놀룰루에는 하와이 한인의 4분의 1인 1,200여명이 회집하여 시 위를 벌였다. 독립축하식 상황은 하와이 현지의 영 자신문 『퍼시픽 콤머셜 애드버타이저(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 4월 13일자 1면에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하와이 영자신문에 실린 3·1독립선언서 3 · 1독립선언서가 영문으로 번역되어 하와이의 영자신문인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1919년 3 월 28일자에 실렸다. 제1면에 「한국 독립선언서 공개되다(Korean Independence Declaration Bared)」라는 제목 하에 ‘선언서(Manifesto)’의 전 문을 싣고 있다. 그리고 그때까지 국내에서 발표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