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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① 95 만에 3천여 명이 가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석주는 “산골짜기 에서 문을 닫고 앉아 있으면서 승패 를 점쳤는데, 한가지도 맞아들어가는 것이 없는 것은 필시 시국에 밝지 못” 해서 임을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동 서양의 신간 서적을 구입하여 세계의 대세 및 적국의 힘을 살펴본 후 오합 지졸로는 대항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1910년 8월에 합방이 조인되고 말 자, 석주는 사람들을 서울 중추원으 로 보내어 송병준 이용구 등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이 시기에 대한협 회 또한 해산하게 되자 임청각을 떠 나 산재(山齋)로 들어가 문을 닫고 사람들을 사절한 후에, 책상 위에 만한지도(滿韓地圖)를 펼쳐두고 보 면서 만주로의 망명을 계획한다. 이때의 심정을 석 주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작년(1910) 가을에 이르러 나라 일이 마침 내 그릇되었다. 이 7척 단신을 돌아보니, 다 시 도모할 만한 일이 없는데, 아직 결행하지 못한 것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일 뿐이다. 어 떤 경우에든 ‘바른 길을 택한다[熊魚取舍].’ 는 것은 예로부터 우리 유가에서 날마다 외 다시피 해온 말이다.” 웅어취사(熊魚取舍)! 공자와 맹자를 평생을 읽어온 석주는 나라가 망하 는 경험을 하면서 맹자의 웅어장(熊魚章)을 떠올린 것 이다. 생선도 먹고 싶고, 그 보다 더 맛이 좋은 곰 발바 닥 요리도 먹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욕망이다. 하지 만 이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당연 히 곰발바닥 요리를 선택할 것이다. 이 비유는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리도 역시 내가 바라는 바이지 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함께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 리고 의리를 택’하해야 한다는 사생취의(捨生取義) 정 신을 강조하기 위해 맹자가 한 말이 아니던가! 사생취의라는 명제 앞에 석주의 고민이 시작된다. 이미 주위에는 망국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었다. 향산 이만도(李晩燾) 는 24일간의 단식으로 순국하였고 그의 조카 이중언 또한 그 뒤를 이어 단식으로 순국하였다. 석주는 이 만도의 순국에 만사를 보내 애도하였다. 이상룡이 사용하던 벼루(매화연)와 지팡이(용장).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