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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4년 10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을 바쳐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로부터 이만도의 벼슬은 나날이 높아졌다.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 사헌 부 지평, 병조정랑, 사간원 사간, 홍문관 교리, 사헌 부 집의(執義), 성균관 사성(司成), 홍문관 수찬(修撰), 공조참의에 올랐다. 벼슬이 높아지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1893년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내려 와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세우고, 후학들을 지도하면 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2월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하였다. 이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하여 농민들 이 고부관아를 습격함으로써 발단되었다. 이 때, 조 정에서는 관군의 힘만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 다고 판단, 청(淸) 나라에 원군(援軍)을 끌어들이면 서 새로운 비극이 시작되었다. 청 나라 군대가 파병 되자 일본이 텐진조약(天津條約, 1885년)을 구실로 서울에 군대를 입성시키면서, 우리나라가 청‧일 두 나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때, 동학농민 봉기가 진압되었지만, 청‧일 두 나라의 군대는 철 수를 거부했다. 우리 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우리나라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이 때, 일본은 청 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 를 확보해가면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 획을 차근차근 실천에 옮겨나갔다. 1894년(고종 31 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에 일어난 갑오변란(甲 午變亂)은 이러한 계획에서 출발한 사건이었다. 일본 은 변란을 일으킨 후, 우리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친 일성향의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하는 내각을 출범시 키고, 내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것을 ‘갑오개혁’이 라고 하는데, 조선침략을 위한 길 닦기였다. 그런데, 일본은 갑오개혁에 머물지 않았다. 미우 라 고로[三浦梧樓]를 공사(公使)로 조선에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새로운 국면을 모색케 하였다. 미우라 는 군인 출신으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외교 의 경험은 전무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울에 부임한 후 1개월여를 칩거하면서 일본의 대(對)조선정책의 걸림돌인 ‘명성황후(明成皇后) 제거’의 음모를 꾸미 고 있었다. 그는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을 이만도가 거주하던 ‘향산고택’의 사랑채(오마이 뉴스 제공). ‘기암고택’ 등 여러 현판이 붙어 있다. 『청구일기』.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이만도가 24일간의 단식 끝에 운명할 때 까지 수행자들이 기록한 일기이다(한국국학진흥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