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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4년 5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에 의해서 1895년 2월에는 교육입국조서(詔書)를 반 포하면서 학교의 설립을 서둘렀다. 그 해 4월에 조정 에서 한성사범학교를 설립했으며, 그 뒤를 이어 흥화 학교 · 정신여학교 · 숭실학교 · 배화여학교 · 명신학교 · 점 진학교 등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오산학교를 세우다 그런데 1905년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 사보호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이 박탈 되고, 나라는 국제적 지위를 잃고 말았다. 이에 민족 지도자들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교육을 통해서 인 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무렵에 도 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 매일신보』의 주필 양기탁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단체의 설립의 필요성에 공감하였 다. 이로써, 이회영 · 전덕기 · 주진수 · 이갑 · 이승훈(李 昇薰) · 안태국 · 이동녕 · 이시영 · 신채호 · 류동열 · 김구 등이 참여하여 1907년 4월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 였다. 신민회의 창립목표는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이 목적을 달 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실력양성이었다. 이를 위 해서,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민족의 식을 심어주고, 항일의 선두에서 투쟁할 인재를 양 성하는 일이었다. 이 때 남강 이승훈이 앞자리에 섰다. 남강은 혼자 살아가야 할 궁리를 하면서 “내가 할 일은 내 스스 로 개척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1907년 (순종 1년) 7월, 고향에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 여 청소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또 신민회의 교육구 국 목적에 따라 그 해 12월 24일 정주에 오산학교(五 山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키워나갔 다. 이 때, 입학생은 김도태 · 김자열 · 이업 · 이윤영 · 이 인수 · 이중호 · 이찬제 등 7명이었다. 남강은 1913년 3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 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을 초빙하여 오산학교의 교육을 맡겼다. 이 때, 고당 은 교사로 부임하여 지리 · 역사 · 영어를 가르쳤다. 2 년이 지난 1915년 5월에 교장에 취임하여 밤낮 없이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오산학교의 발전에 온힘을 쏟았다. 고당은 교장이요, 교사요, 사감이요, 사환으 로서 1인 4역을 수행하면서 제2세 교육에 온몸을 바 유기로 유명했던 정주 납청마을 전경 이승훈이 운영한 납청 유기공장에서 만든 방짜유기(놋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