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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3년 10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각국 대표단에 청원을 하였고, 미국 언론에 한국의 요구를 싣는 등 제한적인 성과는 있었다. 워싱턴회 의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외교활동을 전담 한 구미위원부는 존폐의 기로에 섰고,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도 국무위원들이 총사직을 표명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기관 주미외교위원부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 를 통해 대미외교 전담기관으로 주미외교위원부를 성립시켰고, 정식 외교기관으로 임시정부의 승인 도 받았다. 그래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 은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로부터 대미외교를 위임 받았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개 설하고 미국에 대해 승인 외교활동을 펼쳤다.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소는 이승만이 구 미위원부 사무실로 써 오던 2층 주택을 그대로 사 용하였다.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공식 외 교기관으로 대미 외교를 전담하며, 임시정부의 승 인 활동에 주력했다. 이승만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 후 헐(Cordell Hull) 국무부장관을 상대로 직접 임 시정부 승인을 교섭했지만, 미국 국무부는 독립운 동 단체에 대해 어떠한 승인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 에 적용된다고 하였다. 이승만은 1942년 3월 24일 헐 국무부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 임시정부를 일개 단체로 취급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은 1942년 5월부터 헐 국무부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등 미국정부를 압박했다. 주미외교위원부가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임시 정부 승인 외교를 펼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재미한족연합회에서는 독자적으로 선전·외교활동 을 추진하기 위해 1944년 6월 10일 워싱턴에 외교 사무소를 설립했다. 주미외교위원부 재조직 문제로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는 등 커 다란 분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에서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재임시킴으 로써,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주미외교위원부와 별 개로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원순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 임명장(1943년,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