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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3년 7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①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고 난 통발이나 올무처럼 여겨 잊어버리도록 버려두 었으니, 어찌 천년 문화의 역사가 이토록 비열하기에 이르렀는가? 대개 만주 온 땅은 부여 이래 우리나라 의 근본이요, 핵심이 되는 곳이다. 3천여 년 동안 그 유족의 혈기가 서로 왕래하여 깊이 잊을 수 없는 관 계였음을 알 수 있다. 29일 눈이 내리다. 『발해사渤海史』를 읽었다. 『만주지지』에 이르기를, “당이 고구려를 멸한 후 고 구려의 옛 신하 중에 사리걸걸중상(舍利乞乞仲象)이 란 자가 있어,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넌 후 태백 산 동쪽을 보전하여 북으로 오루하(奧婁河)를 경계로 방벽을 세우고 굳게 지켰다. 당 무후(武后)가 그를 봉 하여 진국공(震國公)으로 삼으려 했으나 중상이 봉작 을 받지 않자, 무후가 노하여 이해고(李楷固) 등으로 하여금 그를 치게 하였다. 이때 중상은 이미 죽고 그 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백성과 말갈의 병 사를 이끌고 해고에 대항하였다. 해고가 패주하자, 조 영이 드디어 읍루의 동모산(東牟山)에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부여(扶餘)와 옥저(沃沮)의 옛 영토를 모두 차지하였다. 당 개원(開元) 초에 발해로 개칭하였다”라고 하였다. 지나(支那)의 역사서를 살펴 보니, 대씨(大氏, 대조영-필자)의 건국은 고구려의 멸 망 후 수십 년 사이이다. 대개 고구려 땅이 하루아침 에 당나라의 영역이 되었다 하나, 그 땅의 각 성곽을 다스려 감독하던 자가 모두 고구려의 옛 신하이며 옛 백성이므로 대씨가 병기를 쓰지 않고도 판도를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이적(李勣)이 상주한 글에 이르기를, “압록 강 이북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읍은 11개 처가 있 는데, 고구려의 남은 명맥이 아직도 꺼지지 않은 것입 니다”라 한 말이 있다. 또 예컨대, “당의 안동도호부를 처음에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에 두었다가 후에 요동으로 옮기고 다시 후에는 신성(新城)으로 옮기며, 다시 후에 평주(平州)로 옮기고 천보(天寶) 2년에 다시 요서로 옮겼다가 결국은 폐지하였다”고도 하였다. 이 것은 당나라 초기에 고구려의 영토를 전부 차지할 수 없는데다 지킬 대책이 없었으므로, 설치하였던 부를 차례로 서쪽으로 옮기다가 발해의 전성기에 드디어 모두 폐지하고 귀환하였음을 뜻한다. 대무예(大武藝) 때에 이르러서는 바다 건너 등주 (登州)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인 일이 있었 으며, 대수인(大秀仁)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여러 군을 침략하고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켰다. 당시 에 발해인은 사람마다 호랑이 한 마리를 당적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대이진(大彛震)에 이르러서는 5 경 15부 62주를 세우고 문물과 제도를 찬연히 구비 하니, 왕조의 전수가 200여 년이었다. 그 강역을 고 ➌ 1911년 서간도 환인현(桓仁縣) 항도천에 있는 윤세복의 집에  가서 1년간 머물면서 『발해태조건국지』·『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등을 저술한 박은식(독립기념관 제공).  ➍ 박은식이 1911년 완성한 『발해태조건국지』. 서간도의 민족학 교 흥동학교에서 교육용 교재로 사용한 것이다(연합뉴스 제공). ➌ 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