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page

순국시론 • 향산 이만도, 자정순국의 길을 걷다 93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 이르러 교인 학살에 대한 항 의를 폈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시작이었 다. 이에 어영중군 이용희(李容熙)가 한강연안을 엄 중히 경비했는데, 프랑스 군함은 일단 돌아갔다. 그 러나, 곧 이어 군함 7척을 거느리고 강화(江華)로 몰 려와 교인 학살에 대한 항의를 폈으나, 우리 조정에 서는 교인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의 불법침입을 들 어 퇴거를 통고하였다. 뒤 이어 두 나라 사이에 교전 이 있었지만, 프랑스 군함이 퇴각함으로써 마무리되 었다. 병인양요가 있은 때로부터 5년 후인 1871년(고종 8년)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있었다. 이는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널 서어먼호(General Sherman號) 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했으나, 우리 관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바 있었다. 1871년, 미국은 이 사건 을 빌미로 삼아 베이징[北京]에 주둔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J)로 하여금 군함 5척을 거 느리고 강화해협을 침략케 했다. 이것이 신미양요의 시작이었다. 이 때, 미국의 함대는 우리 관군의 수비 벽을 뚫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것은 이 뿐이 아니 었다. 1868년, 이웃한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을 통해서 서구의 선진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보다 앞서 개화에 눈을 떠갔다. 이처럼 근대화에 성 공한 일본은 우리 조정에 통상을 요구하거나 침략의 손길을 뻗어왔다. 1875년 9월 군함 운요호[雲揚號] 의 불법침입으로 야기된 조‧일 양국의 군사충돌이 있었는데, 일본은 이 충돌의 책임을 우리 측에 씌워 무력으로 강압, 개항을 강요함으로써 그 결과 조일 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 1876년)을 체결하고 정 치적‧경제적 세력을 우리나 라에 침투시켰 다. 이어서 일 본은 1904년 2 월 한일의정서 를 강제로 체결 하고, 내정간섭 을 시작하였다. 이만도가 관직에 몸담게 된 시기에는 구미열 강들 이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면서 우리 조정을 압박해왔 으며, 이웃한 일본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였다. 이에 이만도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라 향산 이만도가 관직에 나아갔을 때 내려진 벼슬은 성균관의 전적(典籍)이었다. 이 때, 그의 아버지 이휘 준(李彙濬)은 성균관 대사성이었는데, 향산에게 “몸 을 나라에 맡겼으니, 나라가 평온하면 치화(治化)로 써 은혜를 갚을 것이며, 위급함을 보면 마땅히 목숨 이만도를 공조참의로 임명하는 교지 (1882년,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한 ‘을 미사변’의 원흉 미우라 고로의 노 년기 모습(한겨레신문 제공)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참살 하는데 사용한 칼. 현재 일본  후쿠오카의 쿠시다신사[櫛田 神社]에 소장돼 있다(뉴스1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