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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➊ • 김대락의 백하일기 ⑦ 93 한다. 백하가 자유(自由)라는 단어로 권유 문을 출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우리 스스로 우리 안에서 문제의 해 답을 풀어내야 한다는 절박하고 절실 한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 다. 왜 그런가? 권유문에서 백하는 조 국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싸늘하게 식은 재 속에서 큰마음을 일으키게 하 기’ 위해서, 더 나아가 ‘물에 빠져 서로 를 끌어당겨 죽는’ 짓 대신에 ‘있는 힘 을 다하여 살기를 도모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하가 판단한 조국의 문 제점은 무엇이었을까? 백하는 조선이 출발할 때는 국가와 국민이 함께였으 나, 오백 년이 흐른 뒤의 조선은 국가 와 백성이 괴리(乖離)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그 결과 ‘태아검(太 阿劍)을 거꾸로 잡고서 칼자루를 초나 라 병사에게 준[도지태아(倒持太阿)]’ 것과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고 백하는 지적한다. 도지태아(倒持太阿)란 무엇일까? 태아는 중국 고 대의 명검(名劍)의 이름인데, 이 명검인 태아(太阿)를 거꾸로 쥐고 그 자루를 남에게 준 것에서 나온 말로 남에게 이롭게 해 주고 오히려 자기(自己)가 해를 입 음을 이르는 말이다. 한편 백하는 위정자와 백성에 화합하지 못하고 괴 리가 되어버린 이유를 조심스럽게 ‘오백 년의 전제 통치(專制統治)’에서 찾으려는 듯하다. 그래서 새로 만든 학교에서 공부할 내용으로 ‘덕을 기르고 신체 를 기르고 지혜를 기르는 일’ 외에도 ‘전제(專制)와 공화(共和), 입헌(立憲)제도’ 등을 모두 강론할 계획 이었다. 여기서 제국(帝國)으로 망한 조국이 공화국 (共和國)으로 재탄생되는 모습의 단초를 엿볼 수 있 을 듯하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첫 출발을 학교의 설 립으로부터 시작한 백하 등은 이 학교가 ‘훗날 우리 [민족이] 성공하는 밑거름이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1910년대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 한인 자치기구인 부민단의 본부 터(길림성 통화 현 광화진 고려관자) 신흥무관학교 쾌대무자 분교 터 근처 민가 전경(2011년 촬영,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