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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93 출전을 앞둔 장 병들 앞에서 “약 무호남(若無湖 南) 시무국가(是 無國家)” - ‘만 약 호남이 없으 면 국가도 없다’ 라는 각오를 다 졌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호남을 지켜내겠다”는 강한 다짐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지휘에 따라 출동을 알리는 북소리 가 높이 울려퍼졌다. 사기가 오른 우리의 전함은 일 제히 돛을 올렸다. 한산도 앞바다에 다다른 우리 전 함은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 하면서 적함을 유인, 지자총통(地字銃筒) · 현자(玄字) 총통 · 승자(勝字)총통을 쏘아대면서 적함을 격파하였 다. 66척의 적함이 맥없이 바닷물에 잠겼다. 한산도대첩! 이는 행주대첩 ·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 왜란 ‘3대첩’으로 불린다. 이 해전에서 우리 수군이 패하면 제해권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순 신 장군의 각오가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1597년(선조 30년) 1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이 순신 장군에게 청천의 벽력이 떨어졌다. 원균(元均) 의 모함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가 내려졌 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약포(藥圃) 정 탁(鄭琢)의 변호로 사형을 면하고 풀려나 권율(權慄) 도원수(都元帥)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7월 원균이 다대포 · 칠천량에서 왜군에게 참패하자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에게 삼도 수군통제사의 어명이 내려졌다. 이 때, 133척의 적 함이 명량(鳴梁, 울돌목)에 몰려오게 되었는데, 이순 신은 회령포(會寧浦)에 이르러 남은 12척의 함선으 로 출격하였다. 이 때, 장군은 “신(臣)에게는 아직 12 척의 함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울 것입 니다”라는 비장한 한 마디를 남기고 출격하였다. ‘사 즉생(死則生)의 결단’이었다. 그리고, 장군은 12척의 함선으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의 적함을 격침 시킴으로써 다시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를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약무호남 시무국가”-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를 되새겨본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해 진도(海陣圖)’ 속의 판옥선 그림 진도대교 앞 울돌목(명량)에 세워진 국내 최대 높이의 이순신 장군 동상 (한국관광공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