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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李圭珆)는 1919년 3월 14일 충남 천안 목천보통학교(木川普通學校)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규태는 당시 목천보통학교 학생으로서 김구응 선생의 지도를 받아 동교생인 김소용(金蘇用)과 함께 태극기를 준비하는 등 학생들의 만세운동계획을 수립·추진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경, 목천보통학교 전교생 179명은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운동은 천안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연행된 그와 김소용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일제의 심문에 배후를 함구하며 잘 견뎠다고 한다. 그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1920년 1월 11일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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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용은 1919년 3월 14일 충남 천안군(天安郡, 현재 천안시) 목천보통학교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당시 목천보통학교 학생으로 김구응(金球應) 선생의 지도를 받아 동교생인 이규태(李圭태)와 함께 태극기를 준비하는 등 학생들의 만세운동계획을 수립·추진하였다.3월 14일 오후 4시경, 목천보통학교 전교생 179명은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운동은 천안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이었다.이로 인해 일경에 연행된 그와 이규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일경의 심문에 배후를 함구하며 잘 견뎠다고 한다. 이후 이규태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가하였고,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농사를 짓는 한편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