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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미국 서부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지 93 소와 과일 농장들이 발달하여 일찍 부터 한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대·중·소 학교가 있기 때문에 한인 2 세 교육을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오 게 되었다. 1909년 당시 로스앤젤레스에는 60여 명의 한인이 있었고, 1916년 에도 50~60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 었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아주에서 동양인들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법안이, 1920년 11월 11일에 통과 되었다. 이에 따라 북가주(北加州)· 중가주(中加州) 지역에서 소작을 하던 한인 농민 들이 대거 로스앤젤레스로 이거하였다. 북가주 맥 스웰(Maxwell)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윤응호, 스 탁톤(Stocton)에서 영업하던 윤혁, 중가주 다뉴바 (Dinuba)에서 있던 김성권도 모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1927년경에는 약 400명의 한 인 동포들이 로스앤젤레스에 살게 되어, 로스앤젤 레스는 북미지역 한인 인구의 ¼이 이곳에 거주하 는 샘이었다. 『신한민보』 1927년 3월 3일자에 실린 「 과객의 눈으로 본 로스앤젤레스 동포의 현상」 이라 는 기사에는, “로스엔젤레스는 우리 전 미주 어떤 지방 보다 가장 우월한 지위를 가짐은 사실”이라고 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한인들은 대부분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자영업은 주로 ‘식물상점(食物商 店)’ 즉 식료품 · 잡화상점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 로는 채소상점, 과일상점, 세탁소, 이발소 등을 하였 다. 1923년 6월 당시 식물잡화점으로는 황성택 · 임 지영 · 김순권 · 송현주 · 선우탄 · 정지영 · 정인영 · 홍치 범 등이 있었고, 1930년대는 임준기 · 김병연 · 김성 봉·안피터·노재호 · 이종현 · 이성규 등이 식물잡화점 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근교에는 채 소와 과일 농장이 많기 때문에, 김용선 · 강군 · 김인 걸 · 이운석 · 홍순택 · 송종익 · 최능익 등이 채소상점 을 하였다. 이밖에 양복세탁업을 하는 윤병희 · 김영 희 · 이살음, 이발소를 하는 김경완 등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한인 은 송철이다. 송철은 1927년부터 동향 사람인 김용 중과 함께 과일과 채소의 위탁판매회사를 공동으 로 창설하였다. 그는 각 지방에서 들어오는 농작물 을 실은 트럭을 도매상으로 인도하여 주거나, 시세 에 따라 판매하였다. 그리고 리들리(Reedley)의 김 형제상회에서 생산되는 넥타린, 자두, 포도, 복숭아 와 토마토 등을 위탁판매하였다. 송철은 김용중과 함께 ‘김 · 송 위탁판매소(K & S Jobbers)’를 설립해, 로스앤젤레스 시장에서 각종 과일·채소를 위탁 판 로스앤젤레스 흥사단소에서 열린 제3회 연례대회(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