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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① 93 “국가에 아무 사고가 없을 때는 국민들이 그 삶을 즐기며 옛것을 지키는 것을 요의로 삼는다.” 그렇다! 일반 국민들이 바라는 것 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지 켜내며 삶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 고 국가의 의무는 이러한 요건을 제 공해 주는 것이다. 태평성대라는 단 어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런 상태 이다. 하지만 태평성대만 있었던가? 우리가 기억 하는 세상은 어쩌면 어려운 시기가 더 많았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어려운 시기는 어떻게 견뎌내야 할 까? 석주는 그동안 살면서 접했던 경험과 독서를 통 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가가 어려움이 많아서 국민들이 목숨조차 잇기 어렵게 되면 조용히 숨어사는 것을 상책 으로 삼는 법이다.” 그런데 국가가 어려움이 극에 달하여 아예 망해버 리는 시기를 만나자 석주는 조용히 숨어사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조국을 떠 나 망명을 결심한 것이다. 석주는 자신의 선택에 대 하여, “지금 나의 이 길을 어떤 이는, 난리를 피하여 삶을 도모하려는 것이라 지목할 것”이다. 하지만 석 주는 주위의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전혀 “괴이”할 것 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국가가 어 려울 때면 조용히 숨어 사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 고 가 우리에게 오랫동안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 지만 석주의 망명길은 ‘조용히 숨어 사는 상책’의 길 과는 전혀 결이 다른 것이었다. 석주가 오롯이 자신 의 한 몸을 온전히 하고 집안을 보전하려 하였다면 그가 객지보다는 고향에 머무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왜인가? 석주에게는 “양전옥답의 곡식과 육지의 고기, 바 다의 어물[陸羞海錯]이 있어 먹고 마시기에 편리하 고, 고대광실에 따뜻한 이불과 커다란 요가 있어 거 처하기에 편안”한 여건이 오래전부터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석주가 태어나 살아온 집은 바로 유명한 임 청각(臨淸閣)이다.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의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은 세조가 조카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 하는 것을 경험한 후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 했다. 이후 그의 아들 이명(李洺 ) 역시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1519년에 지은 집이 바로 임청 각인데, 이 집은 현존하는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가정 집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룡 일가의 만주(중국 동북지방) 망명길(안동MBC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