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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24년 7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①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1911년 신해년은 윤달이 들어있었다. 6월이 윤달이었다. 백하 김대락은 1911년 윤6월 12일 권유문(勸諭文)을 지었다( 이 글이 백하일기에는 7월 4일 자에 실려 있다). 백하가 권유문을 지은 이유는 두 달 전인 5월에 문은 연 학교의 학생들을 권 면 (勸勉)하기 위해서였다. 조국을 떠난 독립혁명가들은 1911년 5월 14일(양력으로는 6월 10일)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 흥 강습소를 개소시켰다. (우리는 이미 5월 14일자 백하일기에서 백하가 손주와 함께 학교의 개소식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을 읽 은 바 있다) 김대락의 백하일기 ⑦ 1911년 신흥강습소 개소에 ‘권유문’지어 학생들 독려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공화제 등 진보적 사상 논해 신흥강습소 교장으로 수차례 추대되었으나 사양 글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신흥무관학교! 주지하듯이 신흥무관학교는 만주(중국 동북지방) 일대에서 무장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던 곳이다. 청 산리 전투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거 참여하였는 데, 그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1907년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항일비밀조직인 신 민회를 결성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국 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910년 12월 전국간부회의 를 열어, 만주 서간도에 토지를 구입하고 여기에 무 관학교를 세워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 을 회복할 것을 계획하게 된다. 이회영 일가가 1910 년 말에 압록강을 건넜고, 이듬해인 1911년 초에는 이상룡, 김대락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한 내 용을 우리가 지금 백하의 일기를 통해 읽고 있는 중 이다. 독립혁명가들은 튼실하고 안정된 한인사회를 건 설하기 위하여 먼저 경학사(耕學社)라는 명칭의 한 인자치단체를 1911년 4월에 조직하였다. 명칭 그대 로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배움에 매진하자는 취지에는 출발한 경학사는 곧바로 학교를 세울 준비 를 하여 한 달 뒤에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 가가(鄒家街)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역사적인 신흥강습소가 출발했다. 몇 차례나 신흥강습소의 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한 뒤에 학생들에게 면학을 독려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작성한 백하의 권유문 은 ‘자유에 대한 뜨거운 열망[自由之熱心]’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