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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24년 6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또, 다산은 이 곳 마재로 찾아온 정조대왕(재위 1777~1800)의 외동딸인 숙선옹주(淑善翁主)의 부군 인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 : 1793~1865)와 함 께 달밤에 한강에 배를 띄어놓고 시를 읊으며, 즐거 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정약용의 민본과 애민 정신 다산은 고향 여유당에 머물면서 18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물렀던 다산초당(茶山草堂 : 사적 제107 호)을 잊지 못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그 곳에 머물면 서 많은 저술을 하였으며, 또 18 제자들에게 다신계 (茶信契)를 조직하게 하여 자신이 떠난 후에도 서로 신의를 지키면서 살아가기를 바랐던 때문이었다. 다산의 제자들은 다산이 떠난 뒤 다산초당에 모여 다산이 떠나고 없는 강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를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 이렇게 적고 있다. “무인년 그믐날 의논,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신의 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떼지어 모여 서로 즐기다가 흩어진 뒤에 서로 잊어버린다면 이는 금수의 짓이 다. 우리들 여남은 사람은 무진년 봄부터 오늘에 이 르기까지 형이나 동생처럼 모여서 글공부를 하였다. 이제 스승은 북녘으로 돌아가시고 우리들은 병처럼 흩어져, 만약 망연히 서로 잊고 신의의 도리로써 생 각하지 않게 된다면 이 또한 방정맞지 않은가. …….” 다산은 강진의 다산초당에 머물던 기간은 관료로 서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지만, 그는 이에 좌절하 지 아니하고 학자로서 실학체계를 구상하고 집필을 계속함으로써 후세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 때, 『목민심서』 · 『경세유표』 · 『흠흠신서 등 의 많은 저서가 이 곳에서 완성되었다. 이러한 다산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여유당. 정약용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전 남 강진으로 유배를 다녀온 뒤에 이곳에서 임종했다(한국관광공사 제공). 수종사에서 내려다 본 두물머리 일대 풍경. 이곳 역시 정약용의 유배 지 강진만처럼 다도해와 비슷한 풍경이다. 정약용 시대에 ‘교유의 장’ 이었던 수종사는 세월이 흘러 최근에는 힐링 명소가 됐다(조선일보 제공). 남양주시 정약용 생가 여유당 부근에 세워진 다산 정약용 동상(경기 문화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