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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23년 7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①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랑 등의 길[道]에서 나와 압록강 서쪽에서 모였다”라 고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면 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서 를 넘지 못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오직 삼한사(三韓 史)에만 이르기를, “기씨는 요동으로부터 대동강 사이 에 그친다”고 하였다. 여기에 근거하면, 기씨의 전성 기, 왕을 칭하던 때에 아마도 차지한 지역이 조금 넓 어져 평양에 이른 듯하다. 그러나 그 국도가 결단코 변경의 한 모퉁이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평양에 도읍하였다는 것은 오류임을 또한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초 사가의 견식이 없어 망령 되이 노예의 근성으로 꾸며 찬술하는 솜씨를 남용하 여 국가의 체통이 손상될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타 인을 숭배하는 데만 힘썼다. 드디어 은나라의 망명 신 하로 하여금 우리 동방의 창업 시조가 되도록 꾸며 사당을 세우고 분묘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을 법 삼아 지켜온 세월이 오래되자 국민의 이목이 모두 바뀌고 지명과 면모의 변화한 자취가 의거할 곳이 없어져 버 렸다. 비록 총명 박아한 학자라 하더라도 어찌 그 진 위를 가릴 수 있겠는가? 역사를 귀히 여기는 까닭은 국가의 체통을 높이고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지금 노예사관으 로 백성을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노예근성을 길러 참 담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정다 산(丁茶山, 丁若鏞-필자)이 이르기를, “다른 글은 모두 창작할 수 있으나 오직 역사만은 창작하기 어렵다”라 고 하였으니, 진실로 지언이라 할 만하다. 25일 김형식이 이병삼(李炳三)을 따라 다시 유 하현으로 떠났다. 젊은 나이에 매진하려는 뜻이 매우 가상하다. 26일 『고구려사』를 읽었다. 살펴보건대, 고구 려의 주몽(朱蒙)이 처음으로 졸본에 도착하였을 때 그 곳은 요동에 있었다. 한대에 현토군의 속현에 세 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고구려였기 때문에 인하여 국 호로 삼았다. 후에 국내성(國內城)으로 이주하니, 지 금의 초산(楚山) 북쪽 압록강의 오른쪽 연안이다. 그 후 다시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주몽은 곧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만주어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탁림망아(卓琳莽阿)’라고 하는데 빨리 발음하면 소리 가 바뀌어 주몽이 된다. 『만주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강역은 동으로 일본해, 곧 지금의 조선반도 동안으로 신라와 접경하 고, 남으로 황해, 곧 지금의 조선반도 서안으로 백제 와 국경이 되며, 요하를 건너 당의 영주(營州), 곧 지금 의 요동만의 으뜸가는 도읍에 닿고, 북으로는 옛 말 갈족의 영토에까지 들어갔다”고 하였다. 『신당서新唐 書』에 의하면 “고구려의 국내에는 큰 요수[大遼]와 작 은 요수가 있는데, 큰 요수는 말갈족의 서쪽 남산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안시성을 거치고, 작은 요수는 곧 혼 하(渾河)이니, 요산(遼山)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남으 로 흘러 양수(梁水), 곧 태자하(太子河)와 합하고 마자 수(馬訾水)가 있으니 곧 압록강으로 말갈의 백산에서 발원하여 국내성 서쪽을 지나면서 염난수(鹽難水), 곧 통가강(佟 家江)과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하 였다. 그 서쪽 지역의 전부와 동남으로는 흥경興京 북 쪽에서부터 조선의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서남으로 는 금주(錦州) 지역 요동반도에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평안도 북쪽 및 성경(盛京)이 북쪽까지 이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