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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순국의 상징, 충정공 민영환 91 판 홍만식, 전 대사 헌 송병선,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진위대 일등병 김봉학 등이 그들이다. 주영공사 이한응도 이역(異域) 의 땅에서 죽음으로 항일의 뜻을 보여주 었다. 전 의정부 참찬 이 상설은 또 어떠하였 던가.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 네거리에 뛰어나와 군중들을 향하 여 “민영환이 죽은 오늘이 바로 전 국민이 죽은 날이 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민영환 한 사람의 죽음 때 문이 아니라 전 국민의 죽음 때문이다”라고 소리 높 여 연설하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쳤다. 또, 주전 원경(主殿院卿) 조남승은 민영환의 유서를 낭독하고, 군중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어찌 이상설 · 조남승 두 사람만의 생각이었 겠는가. 2천만 우리 동포 모두의 생각이요, 심정이 었다. 1905년 11월 30일, 이 날 일제를 향하여 비수 (匕首)를 뽑아들었다. 2천만 동포가 하나 되는 날이 었다. 서울 시민들은 종로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대 를 습격하여 군경 여러 명이 부상하였다. 각급 학교 교장과 교사들은 출근을 거부하고, 학생들도 동맹휴 업을 통하여 시국(時局)을 성토하고 순국열사의 넋을 기렸다. 한편, 조정에서는 민영환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대신(議政大臣)을 추증하고, ‘충정(忠正)’의 시호를 내렸는데, 그의 발인일(發 靷日) 에는 조문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뿐만이 아니 었다. 민충정공의 영여(靈與)가 대한문(大漢門)에 이 르렀을 때 고종황제도 곡하며 마지막으로 그를 작별 하였다. 민충정공 민영환의 애국충정이 고종황제의 가슴에도 와닿음이었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민영환의 혈죽도 족자(연합뉴스 제공)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로 옮겨진 민영환 동상(서대문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