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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⑩ 91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 - 兵死地含笑入地可也 戊申 二月十九日 舍兄金準書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 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무신(1908)년 2월 19일 형 준이 쓰다. 김태원 의병장의 최후 1908년 3월 26일 토물(土泉)전투에서 적을 유인 하여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 30여명을 살상케 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 형제 의병부대에 철 저히 농락당한 일제는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였을 뿐 아니라, 광주수비대와 헌병을 총출동하는 ‘대토 벌작전’을 펼쳤다. 이에 김태원 김율 의병부대는 전 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영광 낭월산 전투에서는 도 포장 최동학(崔東鶴)을 잃었고, 대곡전투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 가운데, 3월 29일 김율이 광주 소지방(현 송정읍)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광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형 태원은 아우의 탈옥 작전을 펼치려 하였다. 하 지만 허리를 다쳐 광주 박산마을 뒤 어등산에 들어 가 잠시 신병을 치료하려다가 거미줄처럼 쳐놓은 일 제 밀정의 제보로 1908년 4월 25일 ‘토벌대’에게 발 각되고 말았다. 일제 기병대와 특설순사대가 김태원 의병부대를 포위하였다. 이를 알아챈 김태원은 부하 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 이미 결정하 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왜놈 총에 죽게 되었 으니 그것이 한이로다. 나와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 이 없다. 너희들은 나를 대신하여 뒷일을 도모함이 옳다”고 이르고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부하들을 탈출시켰다. 기어이 끝까지 남겠다는 부하 김해도 (金海道) 등과 함께 적진을 향해 총탄을 퍼붓다가 일 본군의 집중사격에 쓰러졌다. 죽는 순간까지 의병장 다운 의연하고 장렬한 순국이었다. 다음 날, 일본군은 한 달 전 체포되었던 아우 율을 데리고 와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뒤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다. 이로써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부대의 활동은 끝났지만, 이들의 영향을 받은 조경환, 전해 산, 심남일, 오성술 등의 의병장에 의해 의병전쟁은 이어져 갔다. 1945년 경북 구미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30여 년 교사생활과 함께 작가, 시민기자로 지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밑에서 창작일에 전념하 고 있으며 광복회 고문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 『허형식 장군』,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항일유적답사기』 · 『누가 이 나라를 지켰 을 까』 · 『영웅 안중근』 · 『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 · 『개화기와 대한 제국』 · 『일제강점기』 · 『미군정 3년사』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과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 『평화와 인권의 대통령, 김대중』 등이 있다. 필자 박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