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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⑤ 91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이 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더욱 모욕을 가하여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와 상하를 능멸하고서 자칭 ‘통감 (統監)’이라 한다. 그 ‘통(統)’이란 것은 무엇이며, ‘감 (監)’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5백년 종사(宗社; 종묘사직의 준말로 나 라 또는 국가)와 삼천리강토와 이천만 동포가 이웃 나라 적신(賊臣; 도적의 신하) 이토(伊藤)에게 빼앗기 는 바가 되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분함을  외쳐보지도 못하고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에  나 백낙구는 스스로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여, 힘껏 일본인 관리를  공격하여 국경 밖으로 내쫓고, 또한 이토 히로부미 를 사로잡아 대마도에 유배중인 의병장 최익현 등을  돌려받고자 하다가 시운이 불리하여 전투에 나서기 도 전에 체포되었으니, 패장이 어찌 감히 살기를 바 라겠는가. 이에 사실대로 말하노라.”- 『대한매일신 보』 1906년 12월 7일자‘敗將口供(패장구공)’을 필자 가 알기 쉽게 다듬어 고침 - 그분의 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말씀으로 지금 들어 도 아주 통쾌합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낙구 의병장은 15년형을 선고받아 1907년 5월 에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순종의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고금도에서 돌아온 그 분은 전주 의병들과 합류하여 전북 태인에서 일본군 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때 전투 형세가 불리해지 자 의병들이 백낙구 의병장을 부축하여 포위망을 벗 어나려 하자, 이에 그분은 ‘그대들은 떠나시오. 여기 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오’라고 하며 앞으로 뛰어나 갔습니다. 그분이 일본군을 향해 ‘백낙구가 여기에 있다’라고 외치는 순간, 일본군 총에서 불을 뿜었습 니다. 백낙구 의병장은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했 습니다. 이때가 1907년 섣달이었습니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백낙구는 두 눈을 실명하여 교자를 타고 도주하다가 세 번이나 체포되 었다가 결국 왜군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광양 사람 들은 백낙구의 발발한 기운을 두고두고 못 잊어 하 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요컨대, 백낙구는 대한제 국기의 유일한 맹인 의병장으로, 그의 항일 투쟁 정 신은 호남 의병 확산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 후손들이 어디 사는지 모르십니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기회에(박선생님 글로) 직 계나 가까운 방계 후손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간 남짓 홍영기 교수의 백낙구 의병장 강의 가 끝났다. 강의료 대신 점심을 산다는 게 오히려 염 치없이 순천대학교 정문 앞의 한 밥집에서 대접을 받고 곧장 순천을 떠났다. 1945년 경북 구미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30여 년 교사생활과 함께 작가, 시민기자로 지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밑에서 창작일에 전 념하고 있으며 광복회 고문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 『허 형식 장군』,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항일유적답사기』 ·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 『영웅 안중근』 · 『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사진 집 『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 · 『개화기와 대한 제국』 · 『일제강점기』 · 『미군 정 3년사』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과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 부입니다』 · 『평화와 인권의 대통령, 김대중』 등이 있다. 필자 박 도